종교

야고보서-16 : 욥의 인내를 배우라

GODblessus 2023. 2. 20. 11: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 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느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자시니라." <야고보서 5;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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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16 : 욥의 인내를 배우라
 
시작하는 말
나는 개인적으로 부자들을 존경합니다. 나도 부자가 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되지 못하였습니다. 대신 예수님을 얻어서 부자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부자가 천국에는 결코 들어갈 수 없다고 못을 박고 있는데, 교회의 설교들은 부자도 얼마든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도 야고보 기자는 부한 자들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들의 사치와 쾌락은 항거하지 않은 노동자들의 피 값으로 누린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핏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한 부한 자들에게는 심판이 기다린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러므로” 로 시작을 합니다. 이런 막강한 부자들의 횡포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주의 형제들에게 가르치려는 의도입니다. 세 가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1. 주님이 오실 때까지 참아야 합니다(7,8절).
에베소서 6장 5~9절은 종들과 상전들에게 권면한 내용입니다. ‘종들은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고 상전들도 종들에게 공갈을 그치라는 말한 다음에 그 이유로 주인이나 종이나 모두 위에 하나님이 상전으로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누구에게나 그리스도께 하듯 섬기며 살면, 실제로 그리스도를 섬긴 것이니 언젠가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실제로 본문 7,8절이 약속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현세의 미래를 향하여 살지 않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를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흐름을 외면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변화를 더 일찍 감지하는 지혜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을 살리고 구원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저주하지 못합니다. 축복할 수만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특권이 기도와 축복권입니다. 그리고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원수일지라도, 나를 핍박하는 자에게도 복을 빌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마5;45).
 


농부가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심정과 같은 것입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곡식은 결코 얻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오시지 않는데 내가 무슨 힘으로 부한 권력자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악을 응징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동일한 악인을 들어 쓰시지 선한 자기 백성을 쓰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선한 용도로만 쓰인다는 점을 절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서로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9절).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라고 합니다. 배가 부르면서 쇠퇴한 기독교의 역사가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 “원망하다”라는 단어는 ‘신음하다’ ‘탄식하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어떤 경우에서든지 핍박과 고난을 도리어 온전히 기뻐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소망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나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무조건 주님만 바라보는 믿음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신 까닭입니다. 고난 때문에 주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구약 민수기 시절에 하나님은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민14;28) 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며 유리하게 된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은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12;36,37)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는 말이 곧 나의 열매이고 나 자신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기자가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마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느니라.”
 


그러므로 율법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서는 구원이 어렵습니다. 저주나 욕설이나 판단이나 비방 같은 심판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의 말로 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잠시도 잊지 마시기를 소원합니다.
 


3. 욥의 인내를 들어야 합니다(10,11절).
성경에 등장하는 참선지자들은 모두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보이며 순교를 하기도 하며 이름도 없이 사라져갔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항상 평안하다, 안전하다 고 말하면서 집권자들 편에 서서 살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야고보 기자는 욥의 인내를 보라고 합니다. 욥이 사단의 참소를 받아 멸문지화를 당하였으나 그가 어떻게 죽음의 터널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갑절의 축복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듣고 보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욥도 욥이지만 주께서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욥기는 선악의 세계를 살아가든 욥이 불의에 당한 고난을 통해서 이 세상 선악의 삶을 청산하고 생명의 하나님의 세계로 돌이키는 이야기를 기록한 대장정입니다. 이 욥기를 제대로 읽는 사람의 수가 너무 희소해서 거의가 참 뜻을 놓쳐버리고 있습니다.
 


욥기 35장에서 청년 엘리후가 나타나서 “너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네 위에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는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을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5~8절)
 


즉 인간들이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적질하고 거짓말하고 이웃의 것을 탐낸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인간들끼리의 이해관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다는 메시지를 흘린 것입니다.
 


맺는 말
욥은 결국 고통가운데서 눈으로 직접 하나님을 뵈옵고 보니, 그 동안에 귀로 들었던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열 두 마리의 짐승의 생태를 일일이 열거하시면서 하나님이 기르신다는 말씀을 해 주셨을 뿐입니다. 거기에는 선악이 없습니다.
 


이제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아갈 때, 누가 옳으냐? 그르냐? 를 가지고 판단하지 말고 한 생명이 사느냐. 죽느냐, 를 보고 언제나 살리는 생명으로 살아지시기를 소원합니다.
 
 
여행자 / 이종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