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모델

한반도가 22세기에 의회단운동을 시작 했군

GODblessus 2023. 3. 28. 20:34
의화단 운동
義和團運動



날짜
장소
청나라 화북지방, 만주
교전국 및 교전세력
지휘관
육현
영록
유록
동복상
섭사성
송경
마옥곤
단군왕
마복흥
마복상
이병형
에드워드 시모어 경
클라우드 맥도날드
알프레드 가젤리
니콜라이 리네비치
알렉세이 쿠로팟킨
예브게니 알렉세예프
파울 폰 렌넨캄프
애드너 채피
에머슨 H. 리스컴
후쿠시마 야스마사
병력
300,000명
71,920명
피해
군인 및 민간인 100,000명 이상 사망
군인 757명 사망
중국 내 기독교인 32,000여 명 사망
서양인 선교사 및 가족 200여 명 사망
결과
8개국 연합군의 승리
[ 언어별 명칭 ]
   
   
 
   
   
   
   
   

1. 개요

2. 배경

3. 의화단의 봉기 및 만행

4. 청나라의 선전포고

5. 8개국 연합군 결성

6. 연합군의 베이징 함락과 보복

7. 전쟁의 종결

8. 종결 이후

9. 기타 국가들의 관여

9.1. 대한제국의 참전

9.2. 오스만 제국의 참전

10. 창작물에서

10.1. 소설

10.2. 연극

10.3. 영화

10.4. 만화

10.5. 게임

11. 여담

12.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부청멸양: 을 도와 서양을 멸하자.)

당시 의화단의 구호

신(神)이 의화단을 돕는 이유는 도깨비 같은 놈들중국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그놈들은 기독교를 선전하고 다니면서 하늘을 모독하고 부처를 경배하지 않으며 조상을 돌보지 않는다. 철도를 부수고, 전선을 끊고, 커다란 기선을 파괴하자. 그렇게 하면 불란서는 간담이 서늘해질 것이고, 영국노서아는 조용해질 것이다. 도깨비 같은 놈들을 모두 죽여서 청나라의 평화를 축하하자.

의화단 선전물

의화단 운동()은 1899년 ~ 1901년 약 2년에 걸쳐 청나라의화단(義和團)이 서구 열강 8개국 연합군과 벌인 국제전쟁이다. 당시 국제정세를 오판한 중국인들이 사실상 전세계를 상대로 싸운 무모한 전쟁이었다. 결국 의화단 운동은 1901년 신축조약을 통해 외국 군대가 중국에 주둔하게 허가하는 빌미를 제공하였고, 수도 베이징까지 유린당하며 끝났다.

대부분의 외국에서는 의화단의 난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는 이 운동의 폭력성 때문에 붙은 이름이 아니고, 도리어 의화단을 앞세워 유럽에 도전한 청이 패배한 후 전쟁의 책임을 의화단에 떠넘겨버리기 위해 지어준 것이라 한다. (즉 실상은 청나라가 이끈 전쟁이나, “의화단이 멋대로 반란을 일으켜 서양인을 죽인 거에요 청나라는 몰라요”한 셈) 실제로 이 전쟁의 화평조약인 신축조약에서 의화단을 부르는 이름은 권비(拳匪)이고, 그들의 행동은 권비창란(拳匪倡亂)이라고 일컫는데, 영미권Boxer Rebellion은 의화권이 권투같다[3] 하여 당시의 스타일로 직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 제국에서는 이 이름을 따서 권비(拳匪)의 난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소위 중화권(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홍콩 등)과 그 영향을 받은 한국의 학계에서는 반외세적 성격에 초점을 두어 "의화단 운동"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현행 교과서, 모의고사, 수능특강 등에서도 모두 중국의 지침을 수용하여 "운동"이라고 나온다. 좀 구식 표현으로는 의화단사변(義和團事變)이 있다.

2. 배경[편집]


청나라아편전쟁의 패배와 영국, 미국, 프랑스 제3공화국, 러시아 제국과의 연이은 불평등조약 체결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동치 연간의 양무운동의 전개로 이러한 내리막길은 일시적으로 저지되었으나 청일전쟁에서 일본 제국에게 크게 패배하면서 막대한 배상금을 물게 되어 다시 몰락을 시작한다. 이런 혼란한 사회상황에서 유럽에서 들어온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유교 등의 동양사상에 익숙한 중국인들에게 마음을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중국을 침략하는 앞잡이로 받아들여졌고,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반외세, 반서양 감정이 계속해서 번져나가고 있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서양 선교사들의 문제도 있었는데, 이들이 중국인들의 땅을 강제로 빼앗아 중국인들의 반감을 샀다. 원래부터 기독교에 적대적이던 청나라 조정과 지방 정부 또한 반서양, 반기독교 정서를 부추겼다. 또 중국인들은 선교사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중국이 기독교의 나라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서양세력을 몰아내자는 의화단의 격문에 그려진 <사저참양도>(射猪斬羊圖)
그림에 있는 십자가에 매달린 채 화살을 잔뜩 맞은 돼지는 예수를, 목이 베이는 은 서양 세력을 뜻한다. 이는 그리스도교의 신을 가리키는 '주'(主)와 '돼지 '저'(猪) 자, 서양을 가리키는 '양'(洋)과 '양'(羊) 자가 중국어 발음상 같기 때문이다. 그림에 그려진 양이 염소인 이유는, 과거에 중국에서 양으로 불려지던 종은 실제 염소였기 때문이다.

3. 의화단의 봉기 및 만행[편집]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세력이 바로 의화단이었다. 소규모 지반이던 이들은 무술을 기반으로 하면서 종교적 색채를 띠기 시작했고, 남아있던 백련교 세력과 결합하면서 큰 무리가 된다. 위안스카이가 강경한 진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의화단의 세력은 계속해서 번져나갔고 이들은 청의 사주를 받아

'청을 돕고 함께 양인들을 물리치자!'

부청멸양(扶淸滅洋)을 구호로 내세우며, 외국인들이나 공사관에 공격을 가했다. 결국 188명의 서구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이 무참히 희생되었고 45,000여명에 달하는 중국인 기독교인들마저 살해되었다.

이렇게 의화단의 계속되는 자국인은 물론 외국인 공격에 분개한 서구는 청 조정에 의화단의 진압을 요청했지만, 청 조정은 진압을 할 여력조차 없었으며 오히려 이들을 옹호하기까지 했다. 당시 의화단은 극심한 잔혹 행위를 자행했는데 학살과 고문 외에도 서양 여성과 기독교를 믿는 자국민 여성을 붙잡으면 곧바로 옷을 벗기고 돌아가면서 윤간을 한 뒤에 산 채로 땅에 묻어 죽였다.

특히나 서양인에 대한 증오가 강했던 의화단은 서양 여성의 경우, 좌용(锉舂)이라고 하여 무참히 윤간한 후 가슴과 음부를 짓뭉개는 등 각종 끔찍한 고문을 하고 죽였다. 이후로 외국 공관이 의화단에 포위당했을 때, 피신해있던 서양 여성들은 이미 의화단의 만행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 자살을 준비할 정도였다.

더구나 양인 여자 1명을 죽이면 은 50냥을, 양인 아이 1명을 죽이면 30냥을 상금으로 주었는데 이런 상금을 받기 위해 기존 의화단 단원만이 아니라 비의화단 중국인들까지 도처에서 살인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서양제 성냥이나 연필을 쓴다는 이유로 일가족을 몰살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据记载,义和团之杀教民毛子也,备诸酷虐,锉舂,烧磨,活埋,炮烹,支解,腰杀,殆难尽述。京西天主堂坟地,悉遭发掘,若利玛窦,庞迪我,汤若望,南怀仁诸名公遗骨,无一免者。保定属有张登者,多教民,团匪得其妇女,则挖坑倒置,填土露其下体,以为笑乐.”

당시 기록된 의화단의 만행을 정리하자면 서양 남녀를 벗겨서 남성의 성기를 자르거나 여성의 음부를 짓뭉개는 좌용(锉舂), 남녀를 벗겨서 불속에 넣어 아주 태우지 않고 익혀서 먹을 정도로 굽는 소마(烧磨), 물속에 넣고 삶아서 익혀 썰어먹는 포팽(炮烹) 등이 벌어졌다. 그 외에도 사람을 산채로 묻어 죽이고(활매, 活埋), 팔과 다리 각을 뜨고(지해, 支解), 칼이나 작두로 머리나 허리를 통째로 싹둑 자르는(요살, 腰杀) 등의 살해 방식이 이루어졌다.

의화단의 봉기에 따른 폭력행위에 관한 주장은 다음 글에 정리되어 있어 신빙성을 잘 따져서 확인해보는 것이 좋다. 글1 글2

아래는 의화단의 잔혹행위를 묘사한 그림이다.

4. 청나라의 선전포고[편집]


청나라의 태도와 의화단의 만행에 영국 등 열강들은 자체적으로라도 병력을 동원해 의화단을 진압하기로 결정하고 시모어를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병력을 베이징으로 이동시키려 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군을 동원해 이들이 베이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고, 청의 조정에서는 회의 끝에 서양과 강화하자는 광서제의 의견을 묵살하고, 서태후가 의화단과 손을 잡기로 결정했다. 광서제는 사실상 실권 없는 허수아비였다.

청나라 조정은 1900년 6월 21일에 서양과 전쟁상태에 들어갔음을 포고했다. 선전포고의 양식이 결정된것은 1907년 개전에 관한 협약 이후이고, 그 전에는 관습법상 국내건 국외건 전쟁을 벌이는 포고 행위만으로도 선전포고로 간주되었다. 1900년 6월 21일에 내려진 선전조서는 국제법상 de facto declaration of war에 해당하며 국제법상으로는 이것도 선전포고로 간주된다. 광서제는 베이징에 있는 외국인 지역을 포위한 후, 이미 의화단의 대규모 무장폭동이 일어난 텐진에서 안전을 위해 24시간 이내에 떠나라고 권고했다. 독일 제국 공사 클레멘스 폰 케텔러는 이에 항의하러 가다가 만주족인 엔 하이가 지휘하는 의화단 무리의 공격을 받고 살해당했다.[4] 이에 독일 공사관을 경비하던 독일 제국 해군의 해군 보병들이 이에 대한 보복으로 청나라 외무아문(외교부)에 쳐들어가 기물을 파손하고 공무원들을 잡아 단체로 린치를 가했다고 한다. 또한, 일본 공사관의 스기야마 아키라 서기도 의화단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한편, 베이징에서도 의화단이 일어났고, 외국인들은 안전을 위해 외국인 지구로 도망쳐 약 4,000여명이 외국인 지구에 갇히게 되었다. 청나라 정부는 자신들의 군대로 호위해서 톈진으로 보내주겠다고 했으나 안전을 우려한 외국인 지구 측에서 이를 거부했다. 청나라 정부는 이들에게 음식 등 기본물자를 제공했다. 외국인 지구로 피신한 사람들에 대한 공격은 중단되었다.

5. 8개국 연합군 결성[편집]



8개국 연합군 해군

의화단의 공격에 맞서 교전하는 영국군과 일본군

이 당시에는 서구 열강들끼리 경쟁 대립 구도, 혹은 적대 구도가 있었는데 "그레이트 게임"(영국 ↔ 러시아 제국)이라든지 "비스마르크 체제"(프랑스 제3공화국 ↔ 독일 제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이탈리아 왕국), 영국 ↔ 프랑스 제3공화국(파쇼다 사건),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의 분쟁이 빈번했다.[5] 그러나 이들 모두(+일본 제국)는 의화단에 의해 자신들의 이권이 침탈당하고 자국민이 학살당하자 그에 분노해 연합군을 조직해 청을 공격하기로 결의했다. 그 수는 지상 병력만 약 50,000명에 달했다.

이중 주력은 일본군(육전대 포함 21,000명)과 러시아군(수병연대 포함 13,000명), 그리고 영국군(해병대 포함 12,000명)이었으며, 여기에 프랑스군미군이 각각 3,000명, 독일 제국군이 해군 보병과 육군을 포함 900명, 이탈리아 왕국군해군 함정과 육군의 베르살리에리 연대[6]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대는 해군 함정만 파견하고 각 함정의 육상병력을 모아 중대 이하 규모로 명목상의 지상군을 편성해서 독일군 또는 영국군의 지휘 아래에 들어갔다.

원정군 사령관은 병력의 규모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국 외교관이 피살된 독일 제국에서 맡아, 총사령관으로는 독일 제국군 참모본부 참모총장을 지낸 독일 육군 제3군 사령관 알프레트 폰 발더제 육군 원수가 임명되었다. 그가 부임도 하기 전에 일단 청 정부는 연합군에 굴복했으나, 이후 1년간 중국에 주둔하면서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다만, 그가 사실상의 전제군주인 독일 황제(카이저)의 신하이며 백작 작위를 소유한 귀족(안할트 데사우 공 레오폴트 3세의 사생아의 후손.)이라는 이유 때문에, 공화국 군대인 프랑스군과 미군은 그의 지휘를 받는 것을 거부했다.


톈진을 함락시킨 연합군

한편, 동남지방의 청나라 원로 관료들은 <동남자보선언>으로 의화단의 세력 확대를 저지했고, 이에 군사력을 집중할수 있게 된 열강은 텐진을 공격해 함락했다. 애초에 이홍장, 위안스카이 등의 청의 군벌들이나 지도층 대부분은 의화단을 진압해야 할 도적으로 보았지, 손을 잡을 상대로 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의화단과 손을 잡으라는 서태후의 명령을 소식을 못들은 것처럼 행동하거나

"태후 폐하가 내린 명령은 의화단이나 그들과 손잡은 간신배들의 수작이니 조작된 것이거나 감언이설에 넘어가 상황을 오판하고 내린 명령임이 분명하므로 따를 이유가 없다"

는 이유를 대며 의화단을 저지하는 판이었다. 이에 따라서 연합군은 후방을 걱정할 필요없이 북경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

이후, 8개국 연합군 내에서 서로간의 이해득실을 계산하느라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베이징으로 진격했다. 러시아 제국은 이때 만주를 공격하기 위해 대군을 동원하는 등, 세력 확장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에 영국 등 다른 열강들의 집중 견제를 받았다. 특히 영국은 러시아에 팽창에 맞서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연합군을 상대로 청나라 군대와 의화단 군대는 계속해서 패배했다. 청군과 의화단의 무장이나 조직력이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 의화단이야 말이 좋아서 반외세 반제국주의 운동이지 그 실체는 깡패 집단과 도적단이 짬뽕된 무리였고, 청군은 청 내부의 기득권층에 의해서 방해받은 개화 때문에 전근대적 군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6. 연합군의 베이징 함락과 보복[편집]



베이징 자금성에 입성하는 연합군

의화단과 연합군의 전투를 그린 일러스트

결국 선전포고한지 2개월도 채 넘기기 전인 8월 14일에 베이징은 연합군에게 함락당했다(제2차 아편전쟁 이후 두 번째). 서태후와 광서제는 간신히 달아났다. 이 과정에서 광서제가 총애한 후궁인 진비 타타라씨가 죽었다. 전후 조정의 공식 입장은 '후궁까지 챙기기 어려운 다급한 상황에서 정절을 위협받은 진비가 스스로 우물에 몸을 던진 것'이었다. 그러나 현장에 있었던 태감과 궁녀들의 증언에 따르면 무술정변 이후 유폐되었던 진비가 서태후 앞으로 끌려왔을 때 황제가 "피난하지 말고 연합군과 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에 격노한 서태후가 태감 최옥귀에게 명령해 진비를 우물에 밀어넣었다. 상황이 다급해서 후궁까지 챙기기 어려웠다는 조정의 입장도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서안 피난길에 대동한 여성 중 진비의 자매이자 광서제의 후궁인 근비도 포함되어 있었다.

서태후는 수도에 남아 강화하려는 광서제를 반강제로 대동하고 8월 15일에 베이징을 빠져나와 천춘쉬안의 보좌를 받아 서안(장안=시안)으로 달아났다. 임자없는 베이징은 혼돈 상태가 되었다. 자국민이 의화단에게 잔혹하게 학살당하는 순간, 8개국 연합군도 당연히 눈이 뒤집혔다. 복수심은 처음부터 예고되어 있었다. 당연히 의화단은 궤멸된다. 영화 <팔국연군>을 보면 의화단 포로들이 일본군의 손에 일제히 참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의화단이 아닌 수많은 중국인들도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당초에 적지 않은 비의화단 중국인들조차 상금을 탐내고 외국인 학살에 적극 가담했다. 베이징을 점령한 8개국 연합군은 3일간 자유 시간을 가졌다. # 그리고 베이징의 이화원 등 많은 건물들이 약탈당하거나 파괴되었다. {경사(京師)의 변(變)}. 특히 독일군이 제일 심했다. 왜냐하면 공사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독일제국 황제빌헬름 2세가 크게 분노하여, 중국으로 원정을 떠나는 독일 제국군 병사들한테

"옛날 훈족아틸라가 그랬듯이, 중국을 상대로 무자비한 약탈과 파괴를 마음껏 저질러서 중국인들을 공포에 떨게 하라."

라고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대, 러시아 제국 군대였으며, 미국과 일본의 군대는 그나마 나았다. 이들은 그 외에도 폭행이나 베이징 시내 거리와 집들을 돌아다니며 중국인들을 납치 강간하는 등의 보복을 행했고, 납치당한 중국인들은 강제노역을 하게 되거나, 여자들의 경우에는 강제로 서양인들의 첩이 되었다.

특히 프랑스군은 청나라인의 특징인 변발된 머리가죽을 뜯는 야만적인 짓거리를 했다. 외인부대라는 책자에 의하면 프랑스 외인부대 또한 이 전쟁에 참전하여 의화단 반군을 죽여 역시 변발이 붙은 머리가죽을 트로피처럼 가지고 다니거나 부대를 장식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그렇게 장식하다가 현재는 말꼬리로 바꾸었다고 서술하며 말꼬리를 장식한 외인부대 행사 사진을 싣기도 했다.


당시 8개 연합국의 병사들을 대표로 차출해 찍은 사진.

한가지 흥미로운 일화로 나중에 8개국 연합군이 북경에 입성했을 때, 베르살리에리 연대는 언제나 걷지 않고 뛴다는 관습에 따라 구보로 입성했다고 한다. 따라서 베르살리에리 나팔수들은 뛰면서 나팔을 불었다. 이건 <북경의 55일>에도 구현되어 있다.#

7. 전쟁의 종결[편집]


결국 청 정부는 전쟁에서 대패하여 화친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열강들은 의화단에 의해 희생된 외국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배상할 것과 의화단과 의화단과 관련된 관리들의 처벌 및 진압 등을 요구했고, 청 정부는 그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의화단을 묵인하고 지원해준 산동순무 육현(毓賢)은 처형되었으며, 의화단을 지지했던 재의(아이신기오로 자이의)는 황족임을 고려하여 아들 부준과 함께 서북 신강으로 추방되었다. 특히, 독일의 외교관이 사망한 것 때문에 광서제의 이복동생으로 훗날 선통제의 생부가 되는 순친왕독일에 가서 빌헬름 2세에게 사죄해야 했다. 순친왕은 황제의 동생 자격으로 파견된 것인데, 본래 독일은 삼배구고두독일제국 황제에게 예를 표하라고 했지만 청측의 로비로 다른 사죄 표현으로 면할 수 있었다.

이후, 열강은 신축조약(베이징 의정서)을 체결해 중국에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키고 철도를 장악했으며 많은 영토와 이권을 떼어갔다. 그리고 서태후의화단에게 패배의 책임을 다 뒤집어씌워 숙청하였다.

8개국 연합군은 대승을 거뒀지만 내부에서는 계속되는 잡음이 있었다. 러시아의 계속된 세력 확장은 영국 등 다른 나라에게 위협으로 다가왔고 전쟁 내내 이러한 문제로 잡음이 계속되었다.

특히, 러시아군은 이 시기 만주에 출격하여 만주 일대를 점령하고 극동총독부를 설치하여 100,000명이 넘는 병력을 배치해 일본에게 불안감을 심어줬다. 신축조약의 청나라측 전권대사 이홍장과 청황실이 러시아에 호의적이었기에 러시아군의 만주 주둔을 사실상 묵인했다. 더 나아가서 연해주처럼 흑룡강성 및 하얼빈의 북만주, 위구르, 내외몽골을 전부 병탄하여 송화강-고비사막을 러시아-청의 경계 로 삼으려고 했으며 이는 러일전쟁의 불씨가 된다.

일본은 의화단 운동을 빌미로 복건성을 식민지화하려고, 하문 침공 사태를 일으켰지만 서양 열강들이 단칼에 거절함으로 인해서 중국에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는 실패했고 서양 열강의 주구, 극동의 헌병, 제2의 식민제국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에 일본은 대한제국을 병합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는다.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을 어떻게 점령할까를 놓고 왈가왈부가 많았다. 대한제국의 전략적 이점상 대한제국에 일본의 이권이 관철되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일본에서 이견이 없었으나 식민지화를 할지, 보호국화할지, 친일 정부를 수립할지를 두고는 갑론을박이 끊이지 않았다. 한국 병합만 해도 대한제국에 자체적 의회와 전주 이씨 왕실을 두고 독일제국-여러 영방국가들의 모델을 따르는 방식 등이 논의되기도 했고, 이토 히로부미처럼 보호국화를 주장하는 인사도 있었으며, 야마가타 아리토모처럼 대한제국 황실을 폐지하고 단순한 식민지로 만들자는 주장까지 여러 주장이 병립했다. 결론적으론 대한제국 황실을 우대하지만 조선은 식민지로 지정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8. 종결 이후[편집]


청나라는 이 전쟁의 패전으로 열강들의 반식민지 상태에 놓이게 된다.

특히, 신축조약의 결과로 사건에 관여한 열강 11개국[11]에게 백은 9억 8천만 냥이라는 막대한 배상액을 지급하게 되었다. 4억 5천만 냥에 연이율 4%로 39년 분납 조건이었다. 이는 청나라의 11년치 재정과 맞먹는다. 현 가치로는 300억 정도, 이후 배상금은 중화인민공화국 때 청산했지만 공산 진영(소련, 동독, 헝가리)에만 지불했다.

더불어 베이징을 지키는 최종 방어선인 톈진 대고구의 포대를 해체하고 코앞 베이징~산해관까지 연합군 군대가 주둔하는 치외법권 지역으로 만들었으며, 이는 청나라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혔다. 이곳은 제1차, 2차 아편전쟁에서 활약했던 포대였다. 특히 2차에서는 당시 최강이였던 서양 함대를 박살낸 전력이 있는 대단한 포대였다. 하지만 이를 해체했으니 수도 베이징 방어가 부실해져버린 것이다. 대한민국으로 친다면 인천광역시에 주둔하는 군부대의 해안포를 모조리 해체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비인륜적인 행위를 자행하고 특히 '주술로 총을 막으려한' 의화단의 이미지는 중국의 후진성을 상징하며 서양 열강의 조롱을 받았다. 이로 인해 아편전쟁청일전쟁 이후로 중국이 '덩치만 큰 미개한 나라'로 업신여겨지던 풍조가 이때 완전히 고착되었다.

그나마 중국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인 게 열강은 의화단 전쟁에서 중국의 광대함에 경악했다. 앞서 말했듯 의화단의 세력 확산은 저지된 상황에서도 중국의 넓은 영토와 엄청난 수의 인구로 인해서 산발적으로 봉기가 일어났고 얼마 되지 않는 열강의 군대로는 그 넓고 인구가 많은 지역의 지배력을 유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비슷한 크기와 인구를 가진 인도를 생각하면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지만, 그당시 인도는 중국처럼 통일된 거대 국가가 아닌 수많은 번왕국들로 나뉘어 지방분권적 성향이 굉장히 강했다.[12] 그래서 각지의 라자를 회유하고 지역 종교 감정을 자극해 서로 대립하도록 유도했다. 이로써 국력이 분산되고 영국의 통치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배의 어려움이 없었다.

반면, 중국은 통일된 국가로 유지된 기간이 길고 넓은 지역을 유지할 정체성이 있었기 때문에 갈라치기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열강들은 중국은 다른 나라처럼 식민지로 만드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또한 유럽의 식민제국들은 동아시아로 진출하기 전에 거느린 식민지들을 유지하기에도 벅찼다. 미국의 경우 본토 자체가 매우 넒고 풍족했기 때문에 굳이 식민지가 필요없었으며, 일본은 아직 근대화 초기였다. 그나마 부동항을 너무 원했던 러시아 정도만 바다 진출을 원했으나 다른 열강의 견제를 받았다. 그래서 열강들은 더 이상의 세력 확장을 멈추고 청에게서 이권만 챙기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게 된다. 서쪽으로 피신해 틀어박힌 서태후이홍장혁광을 전권대신으로 보내 화의를 청하자, 연합군이 선뜻 응한 것도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후에 일본이 중국을 정복하기 위해 중일전쟁을 일으켰지만 아무리 국민당군을 몰아 붙여도 결코 중국 대륙을 석권할 수 없었다.

한편, 의화단 전쟁의 패배로 지식층은 물론,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도 이대로는 안된다는 절박한 의식이 자리잡게 된다. 지식층은 서구 문물을 계속해서 받아 들이는 한편, 사실상 서구 제국들의 허수아비로 전락해버린 만주족의 청 조정에 대한 회의와 실망감이 커졌다. 이 시기 한족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가 대두되었고, 이는 1911년신해혁명이 일어나는 밑바탕이 된다.

9. 기타 국가들의 관여[편집]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던 중, 러시아 제국고종에게 참전할 것을 제의했으나 당시 대한제국군의 군세는 열악하고 국내에 침입한 의화단과 청군을 막기에도 벅찬 관계로 고종은 거절했다. 청나라에서 넘어온 의화단과 청군이 평안도함경도를 월경하여 약탈하자 점차 대한제국군을 강화시켰고, 1901년에는 예산의 41%를 국방비에 편성하여 대한제국군의 전력을 강화하였다. 고종은 평안북도 관찰사에게 진위대 예하 대대들을 나누어 배치하였고 이들과 교전하였다. 진위 5연대의 소대장 조기설 김성열 강희규 등이 청나라 비적 400명을 격파했다는 기록도 있다. 1900년에는 이범윤을 북간도로 파견하여 조선인 보호 정책을 추진하였다.

1902년부터는 산발적으로 압록강두만강을 넘어 요동과 간도에도 진출하여 영유권을 두고 청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때 요동과 간도에 출병한 청군은 15,000여 명으로, 평안도함경도의 진위대, 이범윤의 사포대에 비해 병력수는 압도적이었으나(대한제국군은 민병대 포함 5,000명 수준이었다.) 훈련 수준과 무장이 열악했고, 러시아 제국이 은근히 대한제국 편을 든 탓에 프랑스군 교관단의 지원을 받은 대한제국군이 승리하는 전투가 대부분이었다. 1903년에는 지금의 선양시만주 봉천 일대와 지린성인 간도 일대에서 대대적인 참호전을 벌이기도 했던 이 영유권 분쟁은 러일전쟁 직전에 중단되었고 이후, 일본이 체결한 간도협약으로 끝났다.

참전과는 별개로 러시아 제국일본 제국을 제외한 연합군의 군수물자 보급을 위해서 많은 인력과 자원을 수출하게 되어 나름 전쟁특수를 누리게 되었고, 이때 얻은 경제적 이득으로 광무개혁을 지속할 자금을 얻었지만, 이 또한 러일전쟁이 벌어지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9.2. 오스만 제국의 참전[편집]


당대 이슬람 세계의 맹주였던 오스만 제국 또한 전쟁에 관여하여 오스만 제국군 장교단을 중국에 보냈다. 오스만이 파디샤의 권위를 내세워 무슬림들인 청나라 회족 부대를 분열시켜 주기를 원했던 독일 제국의 제안 때문이었다.

10. 창작물에서[편집]


10.1. 소설[편집]


10.2. 연극[편집]


  • 문화대혁명 당시, 중국에서 재평가를 받아서 관련 연극이 만들어졌다.

10.3. 영화[편집]


  • 의화단의 난을 다룬 영화로 미국에서 제작한 <북경의 55일>(55 Days At Peking, 1963)과 장철 감독이 중화민국군의 지원을 받아 제작한 <팔국련군>이란 영화가 있다. <북경의 55일>은 서양쪽 시각으로 다룬 영화로, 찰턴 헤스턴, 데이비드 니븐 같은 당대의 명배우들이 출연하는데, 의화단의 난에 대해 매우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으로 그려져 있다.

  • 반대로 중화민국에서 제작한 <팔국련군>(八國聯軍, 1976)은 소품같은 물증쪽은 고증이 제대로 안되어 있지만, 서양 열강들의 만행을 생생히 그리고 있으며 의화단 전쟁에 대해 개략적이나마 알 수 있다. 장철 감독이 대만에서 '장궁전영공사'라는 자신의 영화사를 세웠으나 사실상 홍콩의 쇼브라더스의 자회사였으며 당연히 영화의 제작비도 쇼브라더스에서 댔다. 이 작품은 또한, 서태후의 악행과 청나라의 무능함도 적나라하게 표현되었는데, 이 점이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의 심기를 거슬려 검열에서 난도질을 당했으며 제목도 <팔국련군>에서 <신권 3장사>라는 제목으로 바뀌어서 개봉되었다. 당연히 영화는 흥행에서도 실패하였다.

  • 장철은 자신이 아끼던, 심혈을 기울였던 영화의 이러한 비극에 대해 안타까운 심경을 자신의 회고록에 고백하기도 하였다. 장철은 젊은 시절에, 국민당이 대만으로 쫓겨가기 이전의 국민당 정부에서 문화, 선전, 영화 분야에서 일했었다. 이때, 영화계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고, 이를 계기로 장철은 영화감독이 된다.

  • 당시 장철은 국민당 인사들과 친분이 있었다. 장경국의 심복이었던 장도번의 막하에서 일을 하며 장경국과 장도번에게 인정을 받았었지만, 한편으로는 장철을 질시하는 세력들도 있었는데, 우선 당시 장철의 나이가 20대 중후반으로 어렸었고, 또 당시에는 모든 공무원들은 중국 국민당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는 법이 있었는데, 장철은 국민당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뒷말이 많았었다고 한다.

  • 이 작품은 다행히 천영오락에서 쇼브라더스 영화들을 DVD로 출시할 때는 검열에 영향을 받지 않은 원본으로 출시가 되었다.
  • <호소자 5>편이란 제목으로 한국에 개봉하던 중화민국 코믹 영화 <만능 운동원>(萬能運動員 1988년작)이란 작품에도 나온다. <호소자>에 나온 세 아역배우가 나왔기에 이런 제목으로 개봉했지만 문제는 <호소자 1>편 오프닝을 무단으로 삽입하여 억지 <호소자 시리즈>로 만들어버렸다.
  • 이 작품에서는 20세기 초 혼란스러웠던 중국을 배경으로 한 코믹한 올림픽을 배경으로 하는데, 인트로에서 짧게 의화단의 난이 언급된다. 물론, 코믹 영화이기 때문에 많이 희화화되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의화단원들은 웃통을 벗고 중국의 슈퍼맨이라는 팻말을 들면서 연합국 군인을 도발하다가, 오히려 공포탄 쏘는 소리만 듣고 도망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 <황비홍 2>에서 백련교가 주적으로 나오는데, 하는 언행은 의화단과 똑같다. 홍콩 영화임에도 의화단이 주적으로 나오는게 묘한 느낌을 주지만, 현대인 입장에서는 제 아무리 자국 세력이라 하더라도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녀자를 겁간한 후 야만적인 방식으로 죽이고, 심지어는 서양 물건 좀 썼다고 자국민까지 거리낌없이 죽였으며 살인에 현상금까지 걸었던 의화단을 좋게 봐줄래야 봐줄 수가 없긴 하다.
  • <황비홍 4>에서는 8개국 연합군이 본 영화의 사왕쟁패 대회를 주최했다는 설정이다. 또한 의화단의 여성 집단인 홍등조(紅燈照)가 등장하며, 영화 후반부에 8개국 연합군이 자금성을 점령하고, 서태후가 피난갔다는 사실이 언급된다. 외전인 <철계투오공>에서도 주요 악당으로 등장하며 자금을 마련하고자 여자들을 납치해 인신매매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영국 상인인 사선(沙仙)을 납치하려 한 건 덤.

10.4. 만화[편집]


  • 방학기 만화 《바람의 파이터》에서 어린 최영의에게 무술을 가르쳐준 머슴 범수가 바로 의화단 반군 소속으로 신분을 숨기고 살아가던 이에게 무술을 배워 고수가 되었다고 각색됐다. 이 만화에서도 의화단 운동이 무술 고수들이 일으킨 전쟁 정도로 엉터리로 잠깐 나온다.
  • 아앙의 전설》 만화들 중 <수색>편과 <약속>편을 그린 중국계 미국인인 진루엔 양(Gene Luen Yang/楊謹倫)이 2013년, 《의화단과 성녀》(Boxers and Saints)라는 만화로 그린 적이 있다. <의화단 소년의 전쟁>(1부)과 <소녀의 전쟁>(2부)으로 특이하게도 진짜 사건과 판타지(주인공들이 신의 힘을 빌려 서양인들과 싸운다)가 섞여있다. '소녀의 전쟁'의 주인공은 서양 선교사가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란 중국인 소녀 비비아나가, '소년의 전쟁'은 경극을 좋아하던 중국인 소년 바오가 주인공이다. 이 두 책에서는 각각 기독교와 외국 세력, 그리고 전통신앙과 의화단의 모순을 다룬다. 스토리 중반부에 비비아나는 바오가 속한 의화단 부대에 잡히게 되고, 바오는 비비아나에게 배교할 것을 종용하지만 비비아나는 이를 거부하고 결국 바오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바오도 서양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기도하고 부적을 태워 재를 먹어 신의 힘을 빌리지만 결국 마지막엔 몰살당한다.[스포일러]
  • 신의 힘을 빌린다 해도 총칼에 맞으면 바로 사망하는 걸 보니 아마 망상인지 진짜인지는 불명. 위에 나와 있는 의화단의 만행도 순화되긴 했지만 표현되어 있으며 순수했던 소년 바오가 점점 의화단의 광기에 물들어가는 묘사도 일품이다. 처음에 서양인들과 중국인 기독교도들이 타고 탈출하려던 기차를 습격했을 때 남자들만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을 살려보냈으나 그 후에 중국인 기독교도 마을을 공격할 때(비비아나가 여기서 잡혀 죽는다) 기차에서 살아남았던 서양인 여성들이 최후의 기도를 드리고 있던 교회를 불지르고 기독교도 가족을 몰살하는 등 변하게 된다. 그 자신도 괴로운지 "서양인은 악한 귀신이다."라고 계속 되뇌인다.

10.5. 게임[편집]


11. 여담[편집]


  • 후에 독일 국방군 원수가 되는 빌헬름 리터 폰 레프가 참전했었다. 당시 계급은 소위.
  • 훗날 미국 대통령을 역임하는 허버트 후버와 아내인 허버트 루가 포위된 거류민들 사이에 있었다. 중국 황제의 광산업 자문관으로 일하기 위해 중국으로 신혼여행을 갔다가 봉변을 당한 것이다.
  •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동아프리카 전역에서 활약해 '아프리카의 사자'라는 별명을 얻은 파울 폰 레토포어베크 장군도 참전했다. 당시 계급은 중위.
  • <사운드 오브 뮤직>의 실제 주인공인 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트랍 해군 소령이 이때 오스트리아 해군 육전대로 참전한 경력이 있다. 당시에는 사관후보생.
  • 당시 양무운동의 실패로 실각한 이홍장이 청나라측 전권대사로 참여하여 신축조약이 체결되었으나 이홍장은 서구에도 잘 알려진 청나라 측 인물이라서 얼굴마담으로 참여한 것 일 뿐, 실질적인 전권대사는 아이신기오로 이쾅이었다.
  • 바이오쇼크 인피니트의 스팀판 공식 한국어 번역에서는 의화단 운동의 영문 명칭인 'Boxer Rebellion'이 '중국인 권투선수 반란'으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 2021년, 미국과 중국 간의 신냉전 시대에 미국과 EU를 비롯한 여러 서방세력이 중국의 위구르 탄압에 대해 제재를 가하자 화춘잉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의화단 운동을 떠올리며 "오늘의 중국은 120년 전의 중국이 아니다"라는 발언을 했고 많은 중국 네티즌들은 이에 찬성하고 지지했다. 공교롭게도 신축조약이 체결된 1901년과 2021년 모두 신축년이다. #
  • 2022년 대만 사태에 대한 G7의 우려에 대해 중국공산당의 <환구시보>는 G7의 '간섭'이 의화단 사건 당시의 '8국 연합군'을 연상케 한다며 반발했다. # 당시 8국 연합군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대신 캐나다가 들어가면 G7 회원국과 일치하긴 한다.
  • 의회단 운동 당시 미 지상군을 구성했던 부대 중에는 9보병연대가 있었는데, 이 부대는 당시 참전한 것을 기리고자 만주 라는 상징 명칭을 가지고 있으며 만주에서 북경까지 85마일을 행군한 것을 기리고자 만추마일이라는 장거리 행군 행사를 한다. 9보병연대는 2015년까지 주한미군 2사단 예하에 있었기에 이를 경험해 본 카투사 출신도 제법 많다.

12.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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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화단 운동을 영어로 옮긴 표현.

[2] '복서 반란'. 의화단원들이 권법을 중시하는 것을 보고 외국인 선교사들이 권투선수(boxer) 같다고 한 데서 온 것. 기타 유럽어들도 이 뜻이다.

[3] 참고로 현대와 같은 복싱이 정립된 것은 20세기 중반 이후의 일이며,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던 19세기 말~20세기 초의 복싱은 기술적으로는 소위 말하는 막싸움에 가까웠다.

[4] 엔 하이는 케텔러의 가죽을 벗기고 그의 심장을 먹었다고 한다. 의화단이 진압된 이후, 그는 독일 제국군에게 잡혀 참수형에 처해졌다.

[5] 심지어는 이 같은 구도에 섰던 국가도 100% 같은 편은 아니었고 경쟁과 이해득실을 가리고 있었다.

[6] 제2차 세계 대전 때 닭털 꽂고 다니기로 유명했던 바로 그 정예 부대다.

[7] 터번을 쓰고 있다.

[8] 피켈하우베를 쓰고 있다.

[9] 베르살리에리 부대원이다.

[10] 여담으로 러시아 제국은 사진에서 제외되어 있다.

[11] 직접 참전하여 의화단 운동을 진압한 8개국과 의화단에게 피해를 입은 3개국(스페인, 네덜란드, 벨기에)

[12] 무굴 제국이 인도 전역을 통일하기 직전까지 세력을 넓히긴 했지만 영국이 진출할 당시 국력이 쇠퇴해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한 상태였다.

[스포일러] 그러나 바오는 총상을 입고 기절했을 뿐 살아남게 된다. 의화단원들의 시체를 넣고 태우는 구덩이에서 겨우 탈출한 뒤 서양 병사에 의해 죽을 뻔하지만 비비아나가 죽기 전 바오에게 보여주었던 천주교식 기도를 하면서 목숨을 건지게 된다. 즉 자신이 죽였던 사람 덕분에 오히려 살게 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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