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자주 읽었던 공룡 책 같은 것들이 있다. 공룡들의 이름과 생태, 복원도가 그려져 있는 책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인데 항상 이 책에는 공룡을 위시로 한 옛날 동물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모습들이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외가 없이 가장 강한 육식 공룡이라는 티라노사우루스가 초식 공룡을 잡아먹으면서 포효하는 그림이 항상 그려져 있다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다보면 육식 동물이 다른 동물을 사냥해서 잡아먹는 장면이 언제나 한 장면 이상은 나온다. 그것도 매우 상세하게 보여준다. 산 채로 뜯어 먹히는 동물들을 보여주면서 나레이터는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자연의 섭리입니다’. 이것이 나의 기분을 아주 이상하게 만든다 생각해보면 동물이 물을 마시거나 똥을 싸거나 모두 자연의 섭리인데, 매체에서 그런 장면은 거의 보여주지도 않고, 설령 나온다 하더라도 별 말 안하지 않나? 그런데 언제나 동물이 다른 동물을 살해하는 모습은 매체에 항상 등장하며, 그럴 때마다 이게 자연의 섭리라고 굳이 누차 강조를 한다. 문득 이 녀석들, 사실 자연의 섭리라는 것을 핑계 삼아 이걸 즐기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사람들은 폭력을 피하고 싫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사람이 사람에게 폭력을 저지르는 것을 넘어서 사람이 동물에게 폭력을 저지르는 것도 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는가. 그러나 그들이 정말 폭력을 싫어해서 이러는 건가? 하며 따지고 보면 그들의 폭력에 대한 욕구는 없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린이들이 보는 공룡 책에 티라노사우루스가 초식공룡을 죽이고 그 시체 위에서 울부짖는 모습이 나오는 것은 그 책을 보는 사람들이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모쪼록 공룡이라는 것은 서로를 잔혹하게 잡아먹고 매우 무섭고 존나 강해야 한다. 실제로 그렇지 않았을지라도 그래야 한다. 그런 공룡의 모습을 좋아하니까 동물 다큐에서 언제나 사자가 얼룩말을 잡아먹고, 악어가 누를 잡아먹고, 북극곰이 물개를 잡아먹고 이런 장면이 등장하며, 때로는 최강의 사냥꾼, 무시무시한 포식자들만 정리해서 등장하는 특집이 나오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그런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들이 폭력을 정말로 싫어한다면 다큐멘터리에서 동물끼리 잡아먹는 장면은 굳이 직접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동물이 동물을 잡아먹는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인데 그냥 간접적으로 표현해도 되지 않나? 그럼에도 자꾸 동물이 동물을 죽이는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이유가 사람이 저지르지 못하는 폭력을 동물끼리 저지르는 것으로 해소하기 위해서 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든다 마치 옛날에는 검투사들끼리 죽이고 죽는 것을 보며 폭력에 대한 욕구도 채우고 즐거움도 받았듯이, 이제는 티비 교양 다큐에서 악어가 얼룩말의 사지를 찢어버리는 장면을 보면서 하는 것이다. 게다가 동물끼리 하는 폭력이라 자연의 섭리라고 핑계대면 이걸 즐기는 나의 죄책감도 사라지니까 정말 무적의 치트키라고 할 수 있다 ‘자연’ 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은 자유롭고, 아름답고, 순수한 곳이다. 하지만 동물과 관련된 매체들이 보여주는 자연은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피가 끓는 살육의 현장이다. 머나먼 옛날에 살던 공룡끼리도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 피가 낭자하게 물어서 죽이는 것은 일상에다가, 사자와 호랑이와 악어는 쉴 틈도 없이 매일매일 사슴과 소를 반으로 갈라 죽이기 바쁜 곳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람들은 살육의 현장으로 연출 된 자연의 모습을 보는 것을 매우 흥미로워 하고 즐긴다는 것이다. 그런 서로 피가 낭자하게 죽고 죽이는 곳으로 연출 된 자연을 특집으로 보면서, 다른 동물의 피로 뒤덮인 사자의 모습을 보고 강력한 동물의 왕이라고 하면서 따봉을 날리기 바쁘다 반대로 ‘자연이 아닌 장소’ 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은 자유롭지 못하고, 아름답지 않고, 순수하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잡아먹히는 동물들을 보면서 자유롭지 않아 불쌍하고 인간이 저지르는 폭력에 노출된 가녀린 희생자들로 표현되는 것이다
근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진짜로 무서운 것은 악어에게 오체분시가 돼서 죽는 동물은 흥미롭고 즐겁게 관람하면서 도축장에서 죽는 동물은 매우 심각하게 본다는 것이다. 단지 자연의 섭리라는 필터 하나 씌워졌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태도의 차이가 생긴다고? 자연은 자유롭고 아름다운 장소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폭력적인 모습만 편집해서 보여줘도 흥미롭고 멋있고 좋은 것이다. 피해자에 대한 연민은 사라지고 피해동물을 잔혹하게 죽이는 포식동물의 입장만 대변한다. 북극곰, 호랑이, 사자는 존나 멋진 개 짱 센 포식자입니다. 자연의 섭리니까! 그러나 인간과 관련된 장소에서는 완벽하게 반대가 된다. 아무리 아름다운 모습으로 포장하려 해도 잔인하고 끔찍한 폭력이다. 인간의 입장은 사라지고 인간에게 죽임 당하는 피해자에 대한 연민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소와 돼지와 닭은 무고한 피해자입니다. 인간은 짐승이 아니니까? 인간세계에서의 폭력과 인간으로부터 타자화 된 자연에서의 폭력을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서 폭력의 주체와 장소만 다를 뿐인데 이렇게까지 폭력에 접근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것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니까 아무리 자연의 섭리고, 동물끼리의 일이라지만 너무 지나칠 정도로 생명을 죽이는 것을 흥미롭고 강력하고 멋있는 것으로 편집, 묘사하려 하는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폭력의 주체, 폭력의 장소를 뒤섞음으로서 다른 동물에 대한 폭력을 바라보는 시선을 혼란스럽게 하려고 한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있는 장면이 ‘졸라 짱 세고 멋있는 포식자’ 의 모습인지, 아니면 ‘폭력에 희생된 무고하고 불쌍한 피해자’ 의 모습인지 헷갈리게 만들어서 자연 상태의 폭력과 인간의 폭력을 다시 생각해보려고 한다 스크랩된 글은 재스크랩이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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