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6. 25. 10:44 https://blog.naver.com/mjoonch/221036988459 |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요16:15-22
따라합시다.
‘예수님은 구름 타고 오시고 마귀는 틈을 타고 온다’
틈을 보이지 맙시다. 꼭 틈새로 기어 들어오는 것이 마귑니다. 마귀가 틈을 타고 들어와서 주는 것이 뭐냐? 근심입니다. 그래서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벗어나기 어려운 것은 근심이라는 마귀다."
누구나 근심에 붙들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근심은 마귀가 주는 것이란 말입니다. 근심은 마귀의 생산품입니다. 마귀 공장에서 찍어내는 상품이 근심과 염려입니다. 이 근심 병에 걸리면 누구든지 망하거나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아주 무력하게 만듭니다. 스트레스나 두통이 생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근심에서 비롯됩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약이 진통제와 수면제입니다. 모두가 근심 염려와 관계된 약들입니다. 그런데 그 약 먹는다고 근심 염려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뿐입니다.
근심의 근원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 근심과 염려를 아주 쓸데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백해무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기관에서 실제로 조사를 해보았더니 사람들은 과거의 일과 미래의 일로 나누어 근심 걱정을 하는데 과거에 있었던 일로 근심하는 일이 30%라고 합니다. 이미 일어난 일들로 인해 염려하고 마음을 아파하는 것인데 이것은 실패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를 염려한다고 해서 돌이킬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끊임없이 밤잠 안 자고 근심을 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아휴 그때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저렇게 했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과거 지사 이미 흘러간 물입니다.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근심한다고 해서 바뀌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60%가 아직도 일어나지 아니한 미래의 일로 인해 근심하고 염려한다는 것입니다. 미래를 아주 비관적으로 보는 것이지요. ‘이렇게 가다간 큰 일이 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지금은 건강한데 틀림없이 뭔가 큰 병에 걸릴거야.... 아니면 앞으로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말거야.. 조짐이 좋지 않아...’ 이렇게 아직도 일어나지 않은, 닥치지도 않은 일들을 미리 걱정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리고 나머지 10%의 사람은 현재의 일, 즉 다른 사람의 불행한 일들이 나에게도 일어나지 아니할까 근심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염려와 근심이 얼마나 비생산적이고 나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근심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교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신앙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주님의 제자들이 이 근심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깊은 근심입니다. 요한복음에 ‘근심’이란 단어가 모두 7번 나옵니다. 그런데 그 중에 6번이 14~16장에 집중적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14~16장은 예수님의 고별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에게 마지막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이 고별설교를 들은 제자들은 근심에 쌓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자꾸 자기들 곁을 떠나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이들이 근심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만 근심이란 단어가 4번이나 나옵니다. 제자들 모두가 커다란 근심에 싸였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제자들을 이렇게 큰 근심에 쌓이게 한 것입니까?
16절을 봅시다. ‘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최종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이제 너희들은 나를 보지 못한다.. 그런데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십자가와 부활을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 곧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기 때문에 볼 수가 없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다시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자들이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까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는 것과 또 3일 만에 부활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반응이 17절에 나옵니다.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
제자들이 3년 동안 주님을 따라 다녔지만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배웠지만 아직도 십자가 고난과 부활에 대해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제자들 모두가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일이라 그렇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아직도 세상입니다. 세상 이치로 영적인 일을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영적 진리에 무딘 것은 그만큼 세상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믿지를 못했습니다. 이런 그들의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18절에 나옵니다.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 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조금 있으면 못 보다가 조금 있으면 보게 된다는 말씀이 도대체 무슨 말씀이냐? 수수께끼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무지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수수께끼와 같이 난해합니다.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지요. 그래서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값진 공부가 성경 공부입니다. 성경을 가까이 하고 바르게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믿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성경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성경 66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원의 진리로, 일점 일획이라도 틀림이 없이 이루어지는 약속의 말씀으로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런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는 고로 도무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9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제자들이 무엇을 궁금해 하고 무엇을 알고 싶어하는지 주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자세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제자들 처럼 모르면 물어봐야 합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그래야 믿음이 자라납니다. 무식과 무지는 다릅니다. 무식한 것은 배울 기회가 없어서 배우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무지는 배울 기회가 있었음에도 스스로 거부한 것으로 무지는 그 자체로서 죄가 됩니다. 신앙은 무지를 배격합니다. 열심히 물어서라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20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주님의 십자가는 분명히 제자들을 비롯해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겐 슬픈 일이었습니다. 곡을 하고 애통해 하는 일이 분명합니다. 이제 얼마 있으면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이 기간 동안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경건한 시간을 보냅니다. 40일을 금식하는 사람도 있고 또 고난 주간에는 주님의 십자가를 몸소 체험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모두가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동참한다는 신앙의 발로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렇게 우리들에게 슬픈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주님의 십자가 때문에 몹시도 허탈해 하며 슬퍼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눅 24장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입니다. 그들이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 하면서 몹시도 슬펴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패션오브 크리이스트’ 같은 영화를 보면 정말로 우리 주님의 십자가 고난은 그야말로 눈물겨운 것이었습니다. 잔혹한 유대 병정과 로마 군인들에게 주님은 거의 죽을 만큼 매를 맞으셨습니다. 그 피 튀기는 장면을 보고 기절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엿습니다.
실제로 주님께서 그 당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얼마나 커다란 충격과 슬픔에 빠졌었겠습니까? 애통해 하는 사람, 탄식하는 사람, 그 자리에 주저앉아 땅을 치는 사람... 모두가 슬픔의 몸짓들이었습니다.
앞으로 제자들 모두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합니다. 비록 너무도 놀랍고 무서워서 골고다 언덕까지 다 따라가지는 못했지만 그들 모두는 큰 슬픔과 함께 근심에 빠졌습니다. 공황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이런 상태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조금 잇으면 나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하셧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근심 걱정 환난 조금 잇으면 지나갑니다.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생각해 복세요. 즐겁고 기쁜 일도 잠시 이듯이 근심 걱정 고통도 잠시입니다. 견디고 인내하면 지나갑니다. 주님도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30년도 아니고 3년도 아닙니다. 3일입니다. 3일은 금방 지나갑니다. 그러니 참고 인내합시다. 기다리는 자에게 그날은 옵니다. 어떤 날입니까? 기쁨의 날입니다. 근심 대신에 기쁨을 주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근심과 슬픔의 원인이었던 십자가가 기쁨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어떤 사람이 자기의 십자가가 너무 크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항변했습니다. ‘하나님 왜 저에겐 이렇게 커다란 십자가를 주십니까? 이걸 매고 살아가려니 너무도 힘이 듭니다. 주님 이 십자가를 다른 사람들 처럼 작게 해 주실 수 없으십니까?’
이렇게 기도를 하는데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가 크다고 불평하느냐? 십자가가 지금은 힘든 것이지만 내 나라에서는 참으로 귀한 것이란다’ 하면서 환상을 보여 주시더랍니다.
환상이 펼쳐지는데... 사람들이 죽어서 요단 강을 건너 천국에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 요단강을 건너는 방법이 배로 건너는 것도 아니고 바지를 걷어서 건너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보니 사람들이 모두 자기가 지고 있는 십자가를 요단강에 걸쳐 놓고 다리 삼아 건너더랍니다. 자세히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십자가가 강보다 작아서 어귀에 걸쳐 지지 않아 요단강을 건너 천국에 들어가지 못해 올고 불고 난리가 났습니다.
이 사람이 가만히 보니 자기 십자가의 크기로는 넉넉히 요단강과 천국 사이를 건널 수가 있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그런 다음 지금까지 불평하고 원망했던 커다란 십자가가 자기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을 분명하게 본 이후로는 자기 몫의 십자가를 오히려 감사하게 여기고 기쁜 마음으로 지고 살았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십자가를 고난을 너무 힘겨워 하거나 나쁜 것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기쁨의 근원이 여기에 있습니다. 큰 고난일수록, 커다란 십자가일수록 나중 더 큰 기쁨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보건대 세상 사람들이 기뻐하는 이유가 한 3가지 됩니다. 첫 번째가 술 취했을 때요 두 번째가 눈 먼 돈이 들어왔을 때요 세 번째는 간절히 원하는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런 이유로 기뻐해야 겠지만 우리 성도들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기쁨의 통로가 달라야 합니다. 무엇으로 기뻐해야 합니까? 십자가로 기뻐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부활의 생명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은 성도들의 이 기쁨을 이렇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21절입니다.
‘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
해산하는 여인을 예로 드셨습니다. 여자가 아니어서 저는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육신의 고통은 해산의 고통으로 알고 잇습니다. 해산의 진통만큼 무서운 것이 잇습니까? 어떤 사람은 아내의 해산 고통을 옆에서 다 지켜 보다가 그 후로는 자기 아내에게 평생 충성을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위대해 보일 수가 없더랍니다.
옛날에는 아기를 낳다가 산모가 죽기도 했습니다. 고통으로 기력이 다 빠져 죽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야곱의 아내 라헬도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산고를 겪었으면서도 아기를 또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해산의 고통을 잊어서가 아닙니다. 여성분들 그 고통 잊으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왜 또 아이를 낳습니까? 해산의 고통보다 생명을 얻은 기쁨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출산한 산모의 얼굴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자애롭고 아름다운 얼굴일 것입니다. 생명을 낳은 기쁨 어디에도 비길 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논쟁이 붙었습니다. 급성 맹장염이 아프냐 해산의 진통이 더 아프냐 옥신각신했는데 심리학자가 정답을 내려주었습니다. 급성 맹장염이 더 아프다고... 그 이유는 해산의 고통이 아무리 아프다고 할지라도 그 고통은 기쁨을 수반한 고통이기에 참을 만 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미있는 고통은 아프기는 하지만 견딜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그 고통은 장차 행복을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해산의 고통이 무서워서 아기를 갖지 않겟다고 하는 엄마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고통이 가져다 주는 기쁨을 알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 이와 같습니다. 힘들지 않고 고난이 없으면 신앙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인내하고 견디며 할 수 있는 이유는 이 고통이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다시 이 기쁨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22절입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 지금은 근심하지만 다시 너희를 보게 될 것이니 기뻐하게 될 것이요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을 자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이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 기쁨이 생겨야 정상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기쁨이 있으십니까? 다윗이 고백합니다. 시편 4:7-8절입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곡식이 많아서 포도주가 풍성해서 즉 소유가 늘어나서 기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으로 내가 기뻐하나이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이런 고백을 드릴 수가 있다면 우리 역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쁨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존재 자체에 있습니다. 이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갈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새로운 동네로 이사 와서 교회를 찾았습니다. 마침 그 동네 사람을 만나서 교회를 소개받았습니다. 거리가 먼 교회였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오다보니 가까운 곳에 교회가 많았습니다. 걸어오다가 마침 자기에게 교회를 소개해준 사람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에게 물었습니다.
“가까운데도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하필이면 왜 그 교회를 소개하셨습니까?”
그러자 그 마을 주민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교회 교인들의 얼굴 표정이 제일 밝습니다.”
얼굴 표정만 밝아도 전도가 됩니다. 기뻐하는 삶이 가장 훌륭한 전도 방법입니다. 현존하는 세계최고의 미술품은 레오나드 다빈치의 모나리자입니다. 최고로 비쌉니다. 이 모나리자를 유명하게 한 것은 그녀의 미모가 아니라 미소입니다. 그래서 미모보다 가치있는 것은 미소입니다. 성도의 미소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어떻게 얻습니까?
시편 126편 5절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바벨론에서의 70년 세월은 한마디로 눈물로 씨를 뿌린 세월이었습니다. 어떤 눈물입니까? 고통의 눈물입니다. 가난에 찌든 눈물입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능력의 눈물입니다. 그리고 지은 죄를 토해놓는 회개의 눈물입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까지 다 진물러 버린 세월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이런 눈물의 세월이 있었듯이 우리 성도들 개인의 역사에도 이런 시간들이 있습니다. 고난의 시간, 연단의 세월, 물질로 어려운 시간, 이모저모로 한숨과 눈물만 흐르는 시간들입니다. 바로 눈물로 씨를 뿌리는 시기입니다. 이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날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날 들입니다. 우리가 과천에서 보낸 세월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열매를 거둔 역사가 없습니다.
모든 열매는 반드시 씨를 뿌린 결과입니다. 씨를 뿌리지 않고 열매를 거둘려고 하는 것은 사기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뿌린대로 거두는 법칙만이 통용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울어야 웃을 날이 옵니다. 우는 자에게 웃음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근심 끝에 기쁨을 주십니다.
이 기쁨은 어떤 기쁨입니까? 울면서 씨를 뿌린 다음에 얻는 기쁨입니다. 울어야 웃을 때가 옵니다. 제가 좋아하는 유대인의 속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울어라 그리고 사람 앞에서는 웃어라’ 삶이 곤고합니까? 괴롭습니까? 뜻대로 되지 않습니까? 우십시오. 울면서 씨를 뿌리십시오.그러면 근심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고통의 눈물을 기쁨의 진주로 바꾸어 주십니다.
우리가 고통 중에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바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근심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참으시면 됩니다. 이제 우리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고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이 기쁨으로 날마다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분당신성교회 문명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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