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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농민들의 삶

GODblessus 2023. 9. 21. 15:48

일본 제국 농민들의 삶

 다다익선  2022. 5. 13. 9:30
 

1930년대 일본 농가의 모습.

박보균 장관 후보자와 김성회 후보자의 이른바 "친일" 발언이 상당히 흥미롭다.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난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얘기하기 이전에, 자칭 친일 세력이 주장하는 일본 제국 시대 당시 일본의 삶이 이어 뗐는지를 얘기하고 싶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대 일본인들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농민들은 조선인이나 다를 바 없는 비참한 삶을 살았다. 물론 일본 농촌의 빈곤함이 사회적 문제가 된 것이 일본 제국 때부터인 것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본 농민들이 가난한 것은 도쿠가와 가문이 쇼군으로 있던 에도 시대(1603 ~ 1867) 때부터 이어져온 문제였다. 에도 막부 시대 일본은 동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농민에 대한 세율이 높았다. 당시 일본 농민들은 농업 생산량의 거의 5~70%를 다이묘(=지방 실권자)에게 빼앗겼다. 비슷한 시기의 조선의 세율이 (일단 공식적으로는) 10%를 넘지 않았던 것과 비교된다. 인구 조사 기록을 보면, 거의 준 내전의 상태였던 센코쿠 시대(전국 시대)를 벗어나 평화로운 사회로의 진입 과정에 있었던 에도 시대에, 1,600만 명 선이었던 일본의 인구는 18세기 2,600만 명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높은 세율로 인해 아사하는 사람, 태어나자마자 부모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람들이 생김에 따라, 18세기 초반부터 에도 막부가 멸망할 때까지 약 150년의 기간 동안 인구는 플러스마이너스 120만 명의 선에서 극도로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양상을 보였다(최고 1828년 2,720만 명 / 최저 1792년 2,489만 명).

물론 에도 시대에 이러한 문제점이 있었다고 한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본주의가 거의 자리 잡지 않았던 중세 시기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제였다. 더군다나 일본은 당시 중앙집권제화가 되지도 않은 국가였고, 여러가지 변인 요소들을 감안했을때 조선이 특별히 일본에 비해 낫다로 할 수 있는 점은 적었다. 그런 만큼 1860년대의 중앙집권제화를 통하여 일본 내 농촌의 모습이 많이 개선되었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현실은 반대였다. 1920년대 이후 일본의 농촌 환경은 점점 안 좋아졌기 때문이다.

일본의 농민들이 평균적으로 조선의 농민들에 비해 딱히 높은 삶의 질을 누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본격화된 것은 1920년대 후반이었다. 다이쇼 시대의 말기와 쇼와 시대의 초기에 일본의 농촌 소득은 급격하게 저하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후쿠오카 현 농회의 조사를 보면 1921년 후쿠오카 현의 농민들이 평균적으로 가지고 있는 농지는 16.5 반(한국의 "단") 그러니까 약 16,363m2였는데, 이것이 겨우 10년 만인 1930년에는 11.0 반, 10,909m2로 줄어들었다. 그나마 1925년 정도까지는 어느 정도 버티는 모습을 보였지만(이때는 그래도 농외소득으로 흑자였던 해가 한두해는 있었다) 쇼와 시대의 개막 이후, 즉 1920년대 후반부터는 그 흑자와 적자의 격차가 배에 가깝게 벌어지게 된다.

이 통계가 물가 상승이나 하락을 반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일본 농민들의 삶이 얼마나 악화되었는지 가늠하기 위해 물가 상승률을 바탕으로 농가 실질 소득이 얼마나 감소했는지 계산해 보기로 하였다. 계산 기준은 일본은행이 매달 발표하는 기업 물가 지수이며, 농촌에 그대로 대입하기에 약간 무리가 있지만 가장 신뢰성 있는 기록이므로(쌀 가격 추세가 1920년대 중반의 산미 증식 계획으로 인해 엉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후술) 물가 상승에 맞춰 농가 소득이 얼마나 떨어졌는지를 참조하는 용도로만 받아들여주시면 되겠다.

1921년(다이쇼 10년) 기준으로 농가의 총 농업 소득이었던 845.2엔은 2019년의 기준으로 134만 7,242엔(한화 1,427만 8,070원)이다. 이것도 적은 수치이지만, 이후의 통계는 더욱 절망적이다. 농가의 손수익이 최고조에 다르렀던 1924년의 996.2엔은 160만 4,159엔으로 1,700만 877원이었다. 최저였던 1928년의 473.0엔은 2019년의 81만 282엔으로, 현재의 858만 7,368원이다. 절대로 물가 하락이나 상승에 의한 급락이 아니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1921년의 농가 소득 수준을 1로 놓고 본다면, 1928년의 농가 소득 수준은 0.6 정도이다. 게다가, 잘 살 때조차 연 소득이 2,000만 원을 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이는 기본적으로 일본 제국의 농민들이 농사만 지어서는 먹고사는 게 아예 불가능했음을 뜻한다. 실제로 해가 가면 갈수록 농사 외의 부업으로 얻는 수익인 농외 수익이 농민들의 수익에서 큰 파이를 차지하게 되는데, 1930년의 통계에 따르면 농민들이 농업으로 얻는 수익은 492.4엔이었고 농외로 얻는 수익은 891.4엔이었다. 물론 노동을 하며 얻는 수익도 값지지만 결국 이는 전체적인 노동 시간이 배로 늘어남과 동시에 삶의 질도 떨어짐을 의미했다. 사실 이 농외 수익을 합쳐도 일본 농민들은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농가 내 수입, 농외 수입, 농사 지출, 기타 지출 등을 모두 포함한 1930년의 농가 총 수입은 -112.8엔이었다. 엄청나게 열심히 일해도 오히려 더 가난해진 것이다.

더군다나 위의 [농가 소득 통계] 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이 조사가 시행된 지역인데, 이 지역은 일본에서 가장 따뜻한 규슈 지역에 위치해있는데다가 규슈 지역에서도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한 후쿠오카 현이다. 그러니까 한국으로 치면 전라도와 같은 지역에서 저 정도로 농민들이 못 살았는데, 도호쿠나 홋카이도 같은 추운 지역에서 농민들이 어느 정도로 못 살았는지는 그야말로 상상이 안 가는 지경이다. 당시를 다룬 기록을 보면, 도호쿠와 홋카이도 농촌의 모습은 거의 지옥도에 가까웠다고 한다. 자연재해 역시 큰 영향을 미쳤다. 1934년에는 도호쿠에서 대기근이 있었으며, 이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완벽하게 회복하지 못한 것이었다.

통계에 따르면, 도호쿠 최북단의 아오모리 현에서는 1934년(쇼와 9년)에 총합 7,043명의 여성들이 인신매매 및 성매매의 대상이 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1931년에 비해 3배 가까이 오른 것이었으며, 연령대로는 11세에서 21세 사이의 영유아 및 청소년들이 가장 많았다. 도호쿠와 홋카이도에서의 상황이 매우 빠르게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처참한 실태로 인하여, 메이지 시대 때부터 다이쇼 말기까지는 꾸준히 농민 인구 비율이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다. 이는 물론 농촌이 힘들어서라고만 치부하기는 힘들고, 산업화로 인한 자연스러운 현상이긴 하지만, 정작 쇼와 시대 이후로는 그 속도가 상당히 저하되는 모습을 보였다. 1936년 시작된 중일전쟁으로 인한 전시 경제 체제로의 전환에도 불구하고, 1925년 전체 인구의 51.4%였던 농가 인구수는 1945년 47.1%로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극심한 농가와 도시간의 빈부격차 차이로 인해, 농가에서 도시로 이동할만큼의 여유조차 가지지 못한 농민들이 많아진 것으로 사료된다. 게다가 농가 인구수가 인구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던 건 당대에 상당히 비정상적인 수치였다. 비교하자면 독일 제국의 경우, 1910년에 이미 농가 인구수가 40% 이하로 떨어진 상태였다. 반면 일본은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45% 이하로 내려간 적이 겨우 한번(이마저도 소작농 징용으로 인한 것) 있었다.

이렇게 된 원인으로는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하나는 일본제국의 체제 결함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제국 정부의 잘못된 정책이다.

우선 체제 면에서 따지자면 소작 제도의 문제점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소작 제도가 에도 시대에 비해 유지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강화되면서, 경제 위기의 시대였던 1920년대에 소작농들이 지게 된 부담은 더더욱이 커지게 된 것이다.

메이지 유신이라는 체제를 갈아엎는 개혁이 이뤄졌음에도 에도 시대와 비교해 봐도 농민들의 삶이 별로 나아지지 않았던 것은 일단 메이지 유신이 농민들의 삶을 개선하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에도 막부를 대체한 신생 제국은 서양의 법을 본떠 여러 가지 법들을 만들었지만(이른바 <대일본제국 헌법>으로 대표되는 근대적인 법안들), 정작 심각하다고 할 수 있는 농민들을 위한 법의 제정은 매우 소극적으로 이뤄졌고(이는 메이지 유신의 주체가 넓게 잡아야 하급 무사들까지고 농민들은 이토 히로부미 등의 예외를 제외하면 거의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주의 권력을 강화하는 법안들이 통과되었다. 가령, 프랑스의 법에서는 지주가 땅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땅에 대한 처분은 소작인이 동의하는 한에서만 이뤄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이 법을 받아들이면서, 지주의 소유권과 처분권만을 인정했고, 소작인이 이에 대해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은 법에 넣지 않았다. 즉 자본주의를 수용한다면서 오히려 지주의 소유권을 더욱 강화하고 소작농의 권한을 약화시켰다.

게다가 1873년 지세(地稅) 법이 개정되었는데, 개정 법에 따라 기존 수확량에 비례해 계산된 세율은 그 땅의 지력에 따라 계산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한마디로, 땅이 얼마만큼 쌀을 "생산했는지"가 아니라 "생산해낼 수 있는지"가 세금 계산의 기준이 된 것이다. 또한 일본 제국 정부는 세금을 쌀이 아닌 현금으로 내게 하였다. 이 새로운 지세 법은 흉작/풍작, 물가 상승/물가 하락과 같은 변수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고, 일본 제국 정부의 세수는 안정되었지만 중소 지주가 몰락하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 1873년의 신(新) 지세 법 개정 이후 수많은 중소 지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했으며, 반대로 부유한 지주들은 근대 자본주의를 받아들여 더욱 강화된 토지 소유권을 바탕으로 더욱 부유해졌다.

추가하자면, 1881년 오쿠마 시게노부의 축출을 통해 대장대신(=기재부장관)의 자리에 오른 마쓰카타 마사요시는 일본의 급격한 개항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막겠다는 명목으로 디플레이션 정책을 추구하였다. 그런데 이 정책이 상품 가치의 폭락으로 이어져, 앞서 언급했던 "물가 하락"이라는 농가 세금 정책에 있어서 매우 치명적이었던 변수로 작용했고, 이는 대다수의 중소 지주와 소작농들이 파산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결과적으로 "마쓰카타 디플레"로 인해 일본 경제는 안정되었지만 농민들의 상황은 악화된 것이다. 소작농들은 지주에게 50% 이상의 수확량을 빼앗겼고, 바뀐 세법(稅法)과 강화된 지주의 권리, 그리고 마쓰카타 디플레 현상으로 파산 지경이 이르러,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아내와 딸들을 도시의 공장으로 보내거나 혹은 매춘으로 팔아넘기는 끔찍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중소 지주의 몰락 역시 매우 가시화되어, 1883년 60.2%였던 소작농/자소작농(자작과 소작을 병행)의 비율이 1910년에는 67.2%로 오히려 증가하는 시대를 역행하는 기괴한 현상이 일어났다. 이 비율은 계속 증가하여, 1941년에는 72.5%, 그러니까 농민의 4명 중 3명이 소작을 짓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사실 이마저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전시 경제로 사회적 약자였던 소작농들이 대거 강제 징용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그 수치가 줄어든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이런 소작농들의 점진적인 증가와 자작농의 몰락은 국가 경제 면에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1900년대 이후 일본 내에서 근대 자본주의가 정착함에 따라 현금이 기본적인 단위로 자리 잡았고, 이는 농민들이 현금으로 세금도 내야 했고 지주에게 돈까지 바쳐야 했음을 의미했다. 따라서 소작농들은 당대의 경제 위기를 더욱 민감하게 겪을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1920년대의 연이은 경제 위기에서 소작농들이 지속적으로 몰락하는 원인이 되었다.

배경적으로 앞의 두 가지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면, 다이쇼 말 쇼와 초의 농가 줄 파산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일본 쌀 가격의 폭락이었다. 이것은 정책적인 문제에 해당된다. 크게 보았을 때 두 가지 문제가 결합하여 일본 내 쌀의 가격이 폭락한 게 일본 농민들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큰 타격으로 다가왔다. 우선 화학 비료가 개발되어서 전 세계적으로 수확량이 폭증한데다가 동유럽 국가들까지 나서서 농작물 수출을 시작하며 전 세계적으로 곡물의 수요량보다 공급량이 더 많은 현상이 일어났다. 두 번째가 중요한데, 일본 정부가 쌀 값을 안정시키는 데에 있어서 실책을 저지른 게 원인이었다.

192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일본 농민들의 삶이 어려워지게 된 것은 대공황과 같은 외부적인 요인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일본 정부가 일본 농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에 대응하기 위한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의 무리한 시베리아 출병은 급격한 군량미의 지출로 인한 쌀값 폭등을 불러왔고 이는 일본 정부가 쌀 값을 안정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1920년대 일본은 조선에서 쌀을 들여와 일본에 푼다는 이른바 산미증식 계획을 시행했고, 덕분에 일본 내에서 쌀의 가격은 다시 낮아지게 되었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생산력을 가진 호남평야의 쌀이 아무런 규제도 제한도 없이 일본 내에 막무가내로 들어오면서, 유통되는 쌀의 비중에서 일본에서 생산된 쌀이 차지하는 비중은 급격하게 낮아졌고, 따라서 일본산 쌀의 가격 역시 대폭락하였다. 게다가 전반적으로 조선 쌀의 수입으로 인하여 일본 내 전체적인 쌀 가격도 하락하였으므로 일본의 농민들은 쉽게 정리하자면 자국의 쌀 가격이 폭락하는데, 자신들이 생산한 쌀이 거기에서 차지하는 비중까지 줄어드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실제로 1920년의 조사에서 일본 열도 내 쌀의 값은 평균적으로 56전이었는데, 산미증식계획이 시행된 이후인 1930년에는 32전으로 떨어졌고(1910년 32전 7리의 가격과 비슷하지만, 물가 상승률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대폭락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는 중일전쟁으로 인하여 만성적인 물자 부족에 시달리게 된 1941년까지도 회복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쌀 값의 대폭락으로 인해 192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의 농가 소득은 엄청나게 추락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농사와 상관이 없는 도시민들에게는 일단은 쌀 가격이 낮아졌으니 좋았지만, 안 그래도 힘든데 이제는 조선 전라도의 농민들과도 경쟁하게 생긴 일본 농민들은 단체로 거지꼴로 변해가던 게 당시 일본 농가의 모습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위의 표에서도 나오지만 일본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농민이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농민들의 소득 하락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컸고 결국 산미 증식 계획은 일본 전체의 경제를 난장판으로 만드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정리하자면, 조선에서는 쌀의 가격이 너무 올라서 농가가 파탄 났는데, 일본에서는 반대로 쌀의 가격이 너무 낮아져서 농가가 파탄 났다. 최소한 쌀값 상승으로 일본이나 조선 한쪽이라도 이득을 봐야 했는데, 조선 농민들은 총독부에 쌀을 거의 무상으로 뺏겼기에 쌀값 상승의 혜택을 못 봤고 일본 농민들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조선 쌀과 자유 경쟁을 해야 했기 때문에 쌀값 하락의 혜택을 못 봤다.

물론 일본인들도 이러한 제국 정부의 방만한 정책들에 대해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정부의 농민 대우에 반발하는 소작쟁의가 외지(조선) 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 내지에서도 매우 활발하게 이뤄졌다. 일반적으로 일본 내에서도 이런 소작쟁의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전전(戰前) 군국주의 정부의 강력한 사상 탄압으로 인해 소작 쟁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기는 어려웠으나, 도호쿠 지역과 홋카이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소작 쟁의가 활발하게 이뤄졌다는 증거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홋카이도청의 사료에 따르면, 홋카이도 내 농민 저항운동에 대한 증거가 1925년부터 1938년까지 폭넓게 포진되어 있다. 1925년은 산미증식계획으로 일본 농민들 대다수가 삶의 벼랑 끝에 내몰린 때이고, 1938년은 중일전쟁 전시 체제로 인하여 좌파 노농 운동권 세력이 활동하기 어려워진 때였다.

결론을 내리자면 일본을 (문화적인 것 이외로까지)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일본제국 시대를 일본의 "황금기"라고 인식하는 사람이 많은데, 오히려 이러한 농가의 소득을 보자면 일본제국은 식민지는커녕 본토 내에서도 거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매일 지옥과 같은 빈곤의 삶을 살았던 것이 일본 제국의 현실이었다. 다이쇼 로망이라고 부를 정도로 부유한 삶을 살았던 것은 도쿄나 교토와 같은 대도시에 살던 일부에 불과했을 뿐이다. 대다수는 굶주렸고, 제국 정부는 오직 영토 팽창에만 관심이 팔려있어 신민들의 복리 향상에는 거의 도움을 주지 않았다. 이것은 일본 제국의 체제가 얼마나 국민을 위한 체제가 아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 일제강점기는 상위 1%를 제외한 모두의 삶을 파멸로 끌고 간 시대였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커녕 일본 본토 근대화론도 될까 말까 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일본을 좋아할거면 일본의 역사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는 태도가 필요해 보인다.

< 참고 문헌 >

[해외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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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kipedia, <Land Tax Reform (Japan 1873)>

* Wikipedia, <Agriculture in the Empire of Japan>

[일본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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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前田尚子, <戦前期農家世帯の家族構成と就業構造 ―福岡県農会『農家経済* 調査』個票データの分析(第1報)―>

* 日本銀行, <企業物価指数>

* 橋本健二, <戦後日本の農民層分解と農業構造の転換>

* 山崎隆三, <現代日本經濟史>

* コトバンク, <松方財政>

* 近藤郁子, <産米増殖計画期の日本と朝鮮>

* ウィキペディア日本語版, <米価の変遷>

* 北海道庁, <農民運動関係の図書・資料>

* 玉 真之介, <1934年の 東北大凶作 と郷 倉の 復興 - 岩手 県 を対 象地 と して>

* 矢上克己, <青森県農村の窮乏化 と児童保護の展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