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급론에 대한 오해 어떤 자들은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을 투자개념으로 생각하여 천국의 상을 바라는 자들도 있다. 교회에서 하는 헌금, 봉사, 예배, 기도가 하나의 투자가 되어 30배 60배 100배로 부풀여 받는다고 목사들이 잘못 가르치기 때문인데, 이런 투자개념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자는 오히려 주님의 책망을 받고 모두 잃어버릴 가능성이 크므로 유념해야 한다. 마13장의 30배 60배 100 배는 이 세상에 뿌려진 천국(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이 사탄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크게 확장된다는 의미이지 절대로 투자개념이 아니다. 신앙과 상급은 투자개념이 성립될 수 없다. 모두가 은혜이고 선물이기 때문이다. 어떤 자들은 주님을 위해 헌신하면 <새로운 집과 전토를 여러 배, 백 배> 나 받는다고 했으므로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로 보상받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것은 <주와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면> 이라는 성경의 문맥을 이해하지 못해서 나오는 오해이다. 그럼 모든 것을 버린 자가 상으로 얻는 <새로운 집과 전토> 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탐욕이 제거된 새로운 재물이다. 소유하고 자랑하며 탐욕을 위한 나의 재물이 아니라 복의 통로가 되고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한 위임받은 재물이다. 주님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재물을 포기한 자에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한 새로운 재물을 여러 배(백 배) 받을 것이라 약속하신다. 그럼 무엇으로 <여러 배, 백 배> 를 받는지, 어떤 식의 보상을 받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마 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막 1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막 10: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배경-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여러 배, 백 배> 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그 앞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전후 문맥을 이해해야 한다. 율법을 지키며 살던 부자인 어떤 청년(관원)이 영적 갈급함 가운데 영생을 얻는 방법을 질문한다. 청년은 율법적인 생활 관습에 젖어 외적인 선한 일에서 영생의 문제를 묻고 있다. 그는 자신이 계명을 다 지키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가 부족하다고 하는 사실을 잘 깨닫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유대 랍비들을 떠나 예수에게로 나아온 것이다. 그는 자신이 구원받을 만큼 충분히 선한 일을 했다고 확신하지 못했으며 그 뿐만 아니라 그는 확실히 선한 일이란 율법에 명시된 계명 이상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받은 율법 교육의 잘못으로 인한 결과이다. 유대인의 율법교육은 끝없이 외형적인 선과 의를 쌓으면 그것이 자신의 공적과 자기 의가 되고, 영생한 삶으로의 조건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많은 계명을 지키고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으나 구원의 확신은 없었고 여전히 영혼의 불안과 궁핍을 느끼고 있었다. 마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 19: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주님은 생명을 얻으려면 계명을 지키라고 권면하신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예수께서 제 1-5계명보다 5-10계명을 더 강조하신 이유는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5-10계명들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강조하면서도 계명의 핵심인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행치 않았다(마23:23). 이처럼 그들은 율법주의에 빠져 종교적 위선을 목적으로 계명을 지켰으며 <자기 의>를 드러 내었다. 이들에 의해 교육을 받은 이 청년도 이러한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높았다.
마 19:18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마 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주님은 계명의 준수 자체를 반대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주님은 부자 청년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명령하셨다. 오늘날 교회 안에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 이신칭의를 주장하면서 계명준수를 행위구원이라 비판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이들은 바울의 이신칭의와 주님의 율법관, 구원관을 오해하는 자들이다.
주님이 비판한 율법주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계명(유전, 장로의 유전)을 통해 난도질하고 제멋대로 해석하여 본질을 왜곡시킨 것에 있었다. 인간의 계명으로 순전한 하나님의 계명을 누더기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인간의 유전을 반대하셨지, 하나님의 계명을 반대 하시지 않았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는 인간의 계명으로 가르치는 자들이 있다. 인간의 자의적 해석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변질시키는 자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율법주의자들과 같다.
막 7: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막 7:9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막 7:13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주님이 비판한 율법주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유대인들이 진정성있는 믿음으로 은밀하게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자기의 의>를 드러 내놓기 위해 종교적 위선(외식)으로 계명을 헛되이 준수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은 외식함으로 사람들에게 영광과 칭찬을 얻었다. 그들은 경건한 척은 하였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는 자들이었다.
계명의 준수 목적은 죄악과 단절하고 자신의 내면을 거룩하게 변화시킴에 있는데 그들은 전혀 변화되지 않고(탐욕과 방탕, 외식과 불법), 형식적으로만, 겉으로만, 맹목적으로만 지켰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계명의 본질(의와 인과 신) 을 놓치고 입술로만 하나님을 섬겼지,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는 자기 의를 나타내고, 종교적 위선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열심과 경건을 드러내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고,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돈벌이 수단으로 사용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다. 이들이 바로 율법주의자들과 같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 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마 23: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구원을 얻는 조건으로의 <율법준수, 율법행위>와 율법행위를 통한 <자기 의>를 반대했지,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로 <칭의>를 얻은 자가 언약적 의무로써 율법의 완성과 성취인 사랑, 순종, 성령을 따라 행함, 성령의 열매를 행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신칭의와 믿음의 행위들(사랑, 섬김, 순종, 성령을 따라 행함, 성령의 열매)는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구원이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회개하고 믿음을 고백한 자들에게 계명의 준수를 금지하지 않고 오히려 계명을 지키라고 명령하셨다.
마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요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계 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주님은 계명을 잘 지켰던 청년을 사랑하셨다.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계명의 준수는 행위구원이 아니다. 계명의 준수는 <구원을 얻는 조건>이 아니라, 은혜로 얻은 구원을 유지하는 조건이며 언약적 의무이다. 그래서 주님은 믿는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계명의 준수를 요구하셨다. 주님은 계명을 지키는 본질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있음을 강조하고자, 계명을 잘 지켜왔던 청년을 시험하신다. 만약 청년이 계명을 형식적으로, 맹목적으로, 종교적 위선으로, 자기 의와 자기 공적을 쌓기 위해, 지켰다면 이 마지막 시험에서 불합격할 것이다.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 청년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다. 그래서 주님은 청년에게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고 그의 믿음을 시험하신다. 마 19: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 19: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막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온전하다>는 뜻의 헬라어 '텔레이오스' 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는 의미이다(마 5:48). 이는 처절하게 자신의 무능과 부족을 통감하고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함으로써 이뤄질 수 있는 완전이다. 이는 절대적인 자기 부인(self-denial)과 철저한 순종 및 완전한 신뢰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만약 청년이 계명을 진정한 마음으로 지켜 온전함을 이루었다면 재물보다는 하나님을 선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형식적으로, 맹목적으로, 자기 의를 위해, 종교적 위선(외식)을 위해 계명을 지켰다면 재물을 택하고 주님을 떠날 것이다. 이러한 온전함의 시험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무시무시한 말씀이다. 눅 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맘몬, 탐욕)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오늘날 믿기만 하면 천당가고, 교회에 헌금, 봉사, 출석만 잘하면 30배 60배 100배로 물질의 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살게 된다고 믿는 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는 말씀은 너무나 실현 불가능한 말씀이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는 말씀은 너무나 치명적이고 상처를 주는 말씀이다. 주님이 하나님과 재물(맘몬, 탐욕)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에 둘 중에 하나만 택하라고 하신다면 우리도 청년처럼 근심하며 떠날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청년의 이야기는 남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의 이야기다. 오늘날 믿기만 하면 천당가고, 교회에 헌금, 봉사, 출석만 잘하면 30배 60배 100배로 물질의 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살게 된다고 믿는 자들에게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라고 물으신다. 우리는 교회에서 열심히 기도, 헌금, 봉사를 했기 때문에 당연히 복과 상급을 엄청나게 받을 줄 알고 기대하고 있지만, 여전히 주 앞에 온전하지 못하고, 부족한 것이 많을 뿐이다. 오늘날 교회에 주님이 나타나서 이 말씀을 신자들에게 하신다면 과연 몇 명이나 순종할 수 있을까? 어쩌면 대다수의 신자들은 <설마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겠지? 청년이 너무 건방지게 구니까 그 사람에게만 해당되었을꺼야!! 어떻게 재산을 전부 팔아서 구제를 해! 말이 안돼지> 라고 안심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에서 주님이 나타나 이 말씀을 하시면 대다수의 신자들이 근심하며 떠날지도 모른다. 오늘날 믿기만 하면 천당가고, 교회에 헌금, 봉사, 출석만 잘하면 30배 60배 100배로 물질의 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살게 된다고 믿는 자들에게 주님이 원하시는 <온전함>에 도달하기는 너무나 어려울지 모른다. 유대인의 신앙관은 재물과 부는 하나님의 축복이요, 가난과 빈곤은 하나님의 저주를 의미했다. 그 실례로 부자였던 욥이 고난을 당하게 되자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의 벌과 저주를 받았다고 믿었다(욥 5:17).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난은 '불편함' 이전에 '부끄러움과 멸시'의 대상이었다(잠 19:7, 23). 이러한 유대인의 신앙관은 오늘날 교회에서 가르치는 번영신학과 긍정의 신학과 유사한 공통점을 가졌다. 교회에서 목사들이 설교하는 것을 잘 들어보라 <재물과 부는 하나님의 축복이요, 가난과 빈곤은 하나님의 저주다> 라고 하지 않는가? 이러한 자들에게 주님이 청년에게 하신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말씀은 부담스럽고, 껄끄러울 뿐이고, 그 청년에게만 해당되지 현대의 신자들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청년은 주님의 시험에 낙심하며 떠나 버렸다. <마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주님을 찾아 올 때는 뭔가 영생의 실마리를 얻을까 호기심에 왔으나, 도리어 주님의 시험에 근심이 가득하여 떠났다. 그래서 주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신다. 못들어 간다가 아니라 어렵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재물에 대한 탐욕은 우상숭배와 같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이지, 재물 자체가 악하기 때문은 아니다.
청년은 계명을 철저히 지켰다고 자부했지만 재물에 대한 탐욕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영생을 얻기 위해 선행을 하며 계명을 완전히 지켰지만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지는 않았다. 청년은 영생을 얻기 위해 계명을 잘 지켰지만 사실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었고, 맘몬을 숭배하고 있었다. 청년의 문제는 계명과 하나님이 분리되어 있었다.
청년은 계명을 잘 준수했지만 맘몬 숭배로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미 단절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영혼은 항상 갈급하고 메말라 있어서 계명 이상의 더욱 강력한 선행을 통해 영적인 만족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그것마저도 불가능했다.
청년의 선행과 계명준수는 자기 자신의 안위와 평안을 위한 것이었지 정작 하나님을 사랑하고,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한 것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에서 종교생활에 열심이지만 하나님을 섬기는게 아니라, 자신을 위한 열심일 수 있다. 청년처럼 신앙생활과 하나님이 분리되어 있을 수 있다. 정말 무서운 말이 아닌가?
나의 종교적 열심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맺음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현세에서 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살고 죽어서는 무릉도원에 들어가 꽃밭에 뒹굴며 나비와 함께 행복하게 살기 위한 것인지, 냉철하게 자신을 돌아보라. 한편 이 '약대'는 '밧줄'이라는 뜻도 있으며, '바늘귀'란 당시에 '바늘 문'이라는 이름의 성의 작은 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마 19: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마 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주님은 눅16장의 불의한 청지기(옳지 않은 청지기) 의 비유에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고 가르치셨다. 즉 재물은 사람들을 살리고, 사람들과의 관계회복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재물이 탐욕과 결합하면 인간관계를 파괴시키고, 인격을 모독하며, 사회악의 근원이 될 수도 있지만, 재물에서 탐욕를 제거하면 사람을 살릴 수 있고, 관계회복을 위한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선하게 사용하는 재물은 영원한 처소로 인도하는 도구가 된다.
눅16: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그럼 왜 재물은 불의한가? 원래 재물 그 자체는 악하지 않다. 그러나 그 재물이 사람의 탐욕과 결합하는 순간 불의한 재물 즉 맘몬이 된다. <불의의 재물, 맘몬=재물+탐욕> 반면 재물이 선한 마음과 결합하면 <선한 재물>이 된다.
딤전 6: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재물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이기에 주인의 목적에 따라 충성되게 사용하여야 한다. 만일 재산을 내것이라 생각하고 자기의 욕망을 따라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어서 불의한 자가 된다.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탐욕의 지배를 받아 주인의 재물을 자기의 욕망을 따라 자기 마음대로 허비하는 자이어서, 불의한 자라 평가받는다. 반면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자는 주인의 뜻에 따라 재물을 선한 목적으로 사용한 자이기 때문에, 충성된 자라고 인정을 받는다.
눅 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재물 자체는 악하지 않다. 재물은 선하게 쓰이면 많은 사람을 살리게 할 수 있는 생명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재물이 탐욕과 결합하면 맘몬이 되고 숭배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경고하신다.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는 무엇일가? 축복이라는 미명아래 물질과 성공을 갈구하지만 정작 맘몬을 숭배하였다는데 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원하는 것은 재물에 대한 탐욕을 제거하심에 있지, 탐욕을 안고 멸망으로 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물질의 복을 주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일 자신의 모든 소유를 포기할 수 있고, 재물에 대한 탐욕을 완전히 제거할수만 있다면 선한 목적으로 사용하라고 재물을 허락하신다.
눅 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No servant can serve two masters: for either he will hate the one, and love the other; or else he will hold to the one, and despise the other. Ye cannot serve God and mammon.
따라서 내 안에 있는 우상인 탐욕(맘몬)을 깨뜨리고 무너뜨려야 한다.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우상은 외형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내면에 탐욕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게 활동한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우상에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내 안에 있는눈에 보이지 않는 우상에 대해서는 너무나 관대하다.
주님이 청년에게 원하신 것은 맘몬을 깨뜨리고 하나님만을 온전히 섬기길 원한 것이지, 재물을 전부 구제하는데 바쳐야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은 아니었다. 청년은 계명을 철저히 지켰지만 맘몬을 숭배하였고, 결국 그의 신앙생활은 처음부터 실패였음을 증명하였다. 우리도 청년처럼 주여!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축복! 성령충만! 외치지만 정작 마음 깊은 곳에는 맘몬의 우상이 자리잡고 있을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처음부터 실패한 것이다.
< 골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재물에 대한 탐욕은 우상숭배라서 영생을 얻지 못하게 방해한다. 그런데 이 세상에 재물에 대한 탐욕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놀라고 낙심한 제자들이 묻는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하나님이 원하는 기준에 다다를 수 없다. 우리는 항상 부족하고 온전하지 못하다. 그래서 절망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의 백성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온전함을 닮을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는 희망이 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 19:25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마 19: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청년은 재물에 대한 탐욕, 맘몬 숭배 때문에 근심이 가득하여 주님을 떠났다. 반면 제자들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 자기의 것을 버리지 못한 자는 주님을 떠났고, 자기의 것을 모두 버린 자들은 주님을 따랐다. 그럼 이들에 대한 주님의 보상은 무엇인가? 주님은 특별히 모든 것을 버린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통치위임을 약속하면서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다스리게) 한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통합한 주의 새로운 백성을 말한다. <약 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그런데 제자들은 다가올 천국에서 주의 백성과는 구별되어 주의 백성을 다스리는 특별한 위치에 있게 된다. 즉 다가올 천국에서는 제자들과 주의 백성들은 구원과 부활의 영광을 누리는 데에는 전혀 차이가 없지만, 통치의 역활에 있어서는 서로 구별되는 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 무엇이 이러한 차별이 생기게 했는가? 그것은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면서 주님이 시련을 당할 때 항상 함께 하면서 견디어 왔기 때문이다.
주의할 점은 이러한 차이를 가지고 천국은 계급사회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많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사상이다.
마 19: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마 19: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주님의 보상-여러 배(백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주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는 자에게 보상을 약속하신다. 모든 것을 버린 자와 그렇지 않은 자는 천국에서 동일하게 취급되지 않고 상급의 차이가 존재한다. 상을 받을 대상은 누구인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 다.
이들이 자기 재산을 포기하고, 가족과의 단절과 가족을 책임지지 않는 모습은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무책임하고, 윤리적인 지탄을 충분히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천국의 관점에서는 보상의 대상이 된다. 오늘날 신자들이 상을 얻기 위해 교회에서 행하는 열심과 비교하여 보라. 과연 비교의 상대가 되겠는가?
마 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막 1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막 10: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상의 내용은 ?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 이 구절은 풀어보면 <새로운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 새로운 집과 전토> 를 백배나 받는데 박해를 겸하여 받고 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새로운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 뜻대로 사는 천국백성 모두가 형제, 자매, 부모이기 때문에 새로운 천국의 가족을 얻게 된다.
마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그럼 상으로 얻는 <새로운 집과 전토> 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탐욕이 제거된 새로운 재물이다. 소유하고 자랑하며 탐욕을 위한 나의 재물이 아니라 복의 통로가 되고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한 위임받은 재물이다.
주님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재물을 포기한 자에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한 새로운 재물을 여러 배(백 배), 박해를 겸하여 받을 것이라 약속하신다. 주님은 탐욕을 완전히 버리고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 자세를 가진 자에게 새로운 재물을 맡기어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게 하신다.
때문에 사람을 살리는부자, 탐욕을 완전히 제거한 부자가 되길 원하는가? 그러면 주님의 시험에 통과하라. 복을 주세요!! 악을 쓰며 기도할 필요가 없다. 주님의 시험에 합격만 하면 주님이 알아서 주의 뜻대로 주시기 때문에, 그 재물로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사람을 살리는데 쓰라
<눅 12:42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그러나 만약 여전히 맘몬을 숭배하고 자신의 재물과 탐욕을 버리지 못한 자에게는 주여! 주여! 더 많이 주옵소서!! 할지라도 더 많은 재물을 주실 수 없다. 왜냐하면 빨리 망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안의 탐욕과 욕망을 보지 못하고 물질의 복과 성공의 복을 달라고만 간구하는 자세는 오히려 나를 망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될 수가 있다.
이러한 자에게 주님이 더 많은 재물을 주신다면, 더 빨리 영생에서 멀어지고 더 빨리 천국에서 멀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 영혼을 살리기 위해 주님은 더 이상의 재물을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가난하게 하실 수 있다. 때문에 번영의 신학과 긍정의 신학이 얼마나 주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져 있으며, 오직 자기만족과 탐욕을 위한 바알의 신학임을 깨닫고 분별해야 한다.
그럼 내세에 얻는 영생은 무엇인가?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믿기만 하면 천당에 간다고 믿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을 포기한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말씀은 너무나 쌩뚱맞고, 낮설다. <아니 이거 행위구원 아니야? 율법주의 같은데?>
그러나 이신칭의로 시작한 구원은 아직 완성이 아니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으로 육신의 정욕을 죽이며, 성령을 따라 행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혀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아직 남아 있다(구원의 즉각성과 점진성, 또는 성화의 즉각성과 점진성).
이신칭의를 얻은 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며,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의 소유를 버려야 하는 언약적 의무를 갖는다. 때문에 이신칭의를 얻은 자는 재물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위임받은 재물을 선한 목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언약적 의무를 갖는다. 그리고 언약적 의무를 충성스럽게 완성하는 자에게는 내세에서 얻는 영생의 완성이 주어진다.
결론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는 자는 현세에서 새로운 천국 가족과 새로운 재물을 여러 배(백 배) 받고, 내세에 영생을 약속 받는다. 모든 소유를 버리고, 재물의 탐욕을 버리고, 주를 따르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는 천국에서 동일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천국에서 나중된 자와 먼저 된 자로 나뉘어 질 것이다. 이런 면에서 천국을 모든 게 동일한 상태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천국을 계급사회로 보는 잘못된 관점은 버려야 한다.
마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NIV] But many who are first will be last, and many who are last will be fi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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