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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마태복음 5:11~12)[출처] 예수님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마태복음 5:11~12)|작성자 청지기

GODblessus 2023. 12. 3. 09:41
예수님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마태복음 5:11~12)
 청지기  2016. 9. 2. 16:37
 
나를 인하여

11절과 12절은 이중적인 목적으로 기술되었다. 일차적으로 이는 10절에 나오는 제8복의 보충 내용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는 3절로부터 10절까지 계속 기술되었던 전체 팔복의 보충 내용으로서의 성격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즉 ‘~ 한 자는 복이 있나니’ 와 ‘ ~ 것임이요’란 정형적인 반복 대구로 이루어진 팔복 본론 부분은 제10절로 끝나고 이에 이어져서 제 11, 12절이 부록 형식으로 나온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 내용은 팔복 전체와 관련을 갖는다고 볼 수 있으나 특히 제 10절에 나오는 여덟 번째 복과 더욱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은 ‘나를 인하여’란 문맥을 통하여도 확인된다. 이는 제10절에 나오는 ‘의 를 위하여’와 비교할 때 ‘~ 때문에’, ‘~ 을 위하여’란 뜻을 지니는 ‘헤네켄’은 동일하고 단지 ‘의’가 ‘나’로 바뀌어진 것만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이는 제 10절에서의 ‘의’가 ‘나’ 즉 ‘예수 그리스도’ 자신임을 보여 준다.

성경이 말하는 바 의로운 삶은 바로 의의 전형이신 예수를 닮아 가는 삶이며,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의미와 동일한 것이다.

한편 본문의 ‘나를 인하여’가 병행 구절인 눅 6:22에서는 ‘인자를 인하여’로 나와 있다. 이는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왕 되신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마태복음에 비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만민의 구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기 위한 누가의 의도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너희를 욕하고

제 3절부터 10절까지 나오는 팔복에 대한 서술에는 모두 ‘저희’라는 3인칭 대명사(아우토이)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본문과 제12절에서는 ‘너희(휘마스)’라는 2인칭 대명사가 나온다. 이처럼 인칭이 바뀐 것은 지금까지 말하였던 객관적인 진리를 이제는 바로 말씀을 선포하시는 예수 앞에 있는 제자들에게 적용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마태복음의 일차적 독자였던 초대 교회 시대의 유대인 성도들이 당면한 현실, 즉 ‘욕과 핍박을 당하고 모든 악한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미래에 주어질 하나님의 복을 바라보면서 결코 좌절하지 말 것을 교훈하기 위한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앞선 제 11절에서 예수께서는 성도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을 삼중적으로 표현하여 강조하셨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자는 욕과 핍박을 당하고 악한 말을 듣는 등의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극심한 고난을 당할 때 사람들은 실의에 빠져 애통해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본문에서 두 번 거듭 명령형을 사용하여 이러한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을 당신의 제자들에게 촉구하고 었다.

여기서 ‘기뻐하고’에 해당하는 ‘카이레테’의 원형 ‘카이로’는 ‘기뻐하다’(2:10)는 뜻 이외에 ‘안녕하다’(26:49)는 의미도 있다. 이는 사람들이 만날 때 주고 받는 인사이기도 하며(27:29 ; 28:9 ; 막 15:18 ; 눅 1:28), 또한 편지 서두에서 사용하는 문안이기도 하다(행 15:23 ; 약 1:1). 따라서 이 말은 마음에 기쁨이 넘쳐나며 행복에 겨운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뒤이어 ‘즐거워하라’로 번역된 ‘아갈리아스데’의 원형 ‘아갈리아오’는 ‘영화롭게 하다’, ‘높이다’는 뜻이 있는 ‘아갈로’와 ‘뛰다’(행 3:8), ‘솟아나다’(요 4:14)는 뜻이 있는 ‘할로마이’의 합성어로서 밖으로 넘쳐나오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희열을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본문의 두 단어가 모두 현재형으로 쓰인 것은 지금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는 상황 가운데서도 그 기쁨이 넘쳐나야 함을 보여 준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받는 핍박은 절망과 고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받게 될 영광과 기쁨의 약속이다. 이러한 사실은 복음을 전파하다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를 바라 본 스데반(행 7:54-60)을 비롯한 많은 순교자들의 삶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본문은 ‘왜냐하면’이란 원인 접속사 ‘호티’로 시작하여 성도들이 극한 고난 가운데서도 역설적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는 문장이다. 고난 가운데서도 성도들이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하늘에 있는 상이 크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상’으로 번역된 ‘미스도스’는 ‘품삯’, ‘임금’, ‘보상’이란 뜻을 지닌다(눅 10:7 ; 딤전 5:18). 본절에서도 핍박을 이겨낸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이 상이 주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급에 대한 약속은 성경에 자주 나오는 주제이다. 이 상급 가운데 가장 중요한 상급영생이며(갈 6:8) 그 외에도 인내와(히 10:35, 36) 선행(딤전 6 :18,19; 딤후 4:6-8) 등 각기 행위에 따른 상급이 주어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기준이 아니라 당신의 기준에 따라 각자에게 적절한 상을 주신다(20:1-16 ; 눅 17:7-10).

한편 본문에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에게 ‘상이 큼이라’는 약속이 주어지고 있다. 본문에서 ‘큼’으로 번역된 ‘폴뤼스’는 크기가 크다(large)는 의미보다는 양이 심히 많은(much)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천국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상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지상의 그 어떠한 보상과도 비길 수 없는 갖가지 보상(절대적인 가치)이 주어진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도는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도 미래에 종말론적으로 주어질 이 상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본문은 상이 주어지는 곳을 ‘하늘에서(엔 토이스 우라노이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를 직역하면 ‘그 하늘들 안에서’이다. 이처럼 본문에서 하늘이 복수형으로 기록된 것은 구약 히브리인들이 하늘이 3충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고 복수형 ‘솨마임’으로 표기한 전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창 1:1). 즉 예수께서는 장차 성도가 들어가서 하나님을 친히 뵙게 될 천국에서 많은 상을 얻게 될 것을 약속하심으로써 이 세상에서 핍박받는 성도들을 위로하시는 것이다.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본문은 ‘왜냐하면’으로 번역되어 원인이나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로 연결되어 앞 문장과 더불어 성도가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가 추가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한글 개역 성경은 제 11절과 마찬가지로 본절에서도 핍박하는 주체가 3인칭 복수 ‘그들’이란 사실을 생략했으나 이를 번역하는 것이 좋다. 이는 어느 특정인이 아니라 많은 불특정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를 핍박하였음을 보여 준다.

또한 본문이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과거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핍박받았던 사실을 회상케 하며 지금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자들도 ‘나를 인하여’(11절) 즉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당연함을 보여 준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하나님을 동등한 위치에 놓으시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에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헌신했듯이 이제는 제자들이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신 그리스도 자신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여 헌신할 것을 촉구하시는 것이다.

특히 예수께서 ‘우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너희’란 뜻이 있는 2인칭 복수 소유격 2인칭 대명사 ‘휘몬’을 사용하신 것은 자신 스스로 영원한 존재임을 암시한다. 만약 ‘우리 전에’라는 표현을 썼다면 구약의 선지자는 그리스도보다 시간적으로 먼저 존재한 자들이 되어 제 2위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영원성이 훼손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과 하나님을 대비시키며 자신의 제자들과 구약의 선지자를 대비시키기 위하여 ‘너희’란 표현을 사용하신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구약의 선지자들과 대비되는 ‘너희’는 단지 예수의 12제자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는 예수로부터 진리를 배우기를 원하고 예수를 추종하는 모든 무리들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서는 1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의 설명을 참조하라. 이러한 사실은 본절 이하에 계속되는 ‘빛과 소금’의 교훈 및 산상 수훈 전체의 교훈이 12제자만이 아닌 포괄적인 의미의 제자들을 대상으로 주어진 교훈이란 사실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출처 ; 옥스퍼드 주석. pp. 333-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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