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마귀는 말씀을 인용하여 시험한다

GODblessus 2023. 2. 9.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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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 마태복음 4장


 
예수께서 공생애로 들어가시면서 처음으로 겪게 되시는 불같은 시련이 있으셨다.

그것이 저 유명한 광야의 시험이다.


마태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


이 대목은 얼핏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기도 하다.


왜 성령님은 마귀에게 예수님을 시험하도록 기회를 주시는가?


그러나, 구약성서의 욥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욥 역시 하나님의 묵인 아래 사단에게 모든 공격과 환난을 받았기 때문이다.


욥과 예수님 역시 하나님을 믿었지만, 반면 하나님도 욥을 믿고,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때로 당신의 큰 경륜 안에서 이런 시험을 허락하신다.


그러나, 그 허락은 모험이 아니다. 이미 그 허락하심 안에는 승리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신자에게도 큰 환난이 밀려온다면, 이를 괴로운 핍박으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 무엇인가 승리하실 것이 있으심을 믿고 바라며 그 시험을 능히 이겨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시험 장소는 광야였다. 광야..광야가 어떤 곳인가?


그곳은 이스라엘이 40년 간 시험을 받던 장소 아닌가?


모세가 40년간 늙어가며 목동으로 훈련받던 곳이 아닌가?


그래서 광야는 전통적으로 시험의 장소로 알려져 있다.


광야는 도시와 달리 볼 것도 없고, 비교할 것도 없다.


그저 황량한 사막과 뜨거운 햇볕 또한 매섭고 추운 밤이 전부인 곳이다.


광야는 사람의 무능함을 철저히 보여주는 곳이다. 나의 한계가 드러나는 곳이다.


진짜와 가짜의 정체가 드러나는 곳이 바로 광야이다.


최근 이스라엘 성지순례 코스에 1박 광야 체험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나도 성지순례를 하게 되면 꼭 그 코스에 참여해 1박이라도 사서 고생을 하고 싶다.


가장 하고 싶은 것은 광야에 나가 부르짖으며 기도해 보고 싶고, 광야의 밤 하늘을 보고 싶다.


어린 시절부터 이상하게 광야라는 곳이 끌렸다. 황량한 광야에서 예수님은 40일간을 주리셨다고 한다.


광야에는 동굴들이 더러있는데, 아마도 그 동굴 안에서 기도하시며 40일을 굶주리신 것 같다.


40일은 고난의 숫자이기도 하다.


솔직히 나는 하루도 금식이 어려운 사람인데..4일도 엄청난 시간인데..

자그만치 40일을 주리셨다는 말씀은 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시간이다.


사람이 배고픔이라는 고통만큼 원초적 고통이 어디 있겠나? 예수의 40일 금식은 많은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 지금 하루에 두끼를 먹을 수 있는 나라가 전세계 인구의 반도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반 이상은 굶주림 속에 산다.


그들의 굶주림의 고통을 우리 예수님은 누구보다 잘 아신다. 몸소 체험하셨기 때문이다.


솔직히 궁금하기도 하다. 예수님이 40일간이나 그렇게 주리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렇게까지 주리시면서 40일간이나 기도하시고 묵상하시며 고뇌하시고 하나님과 교통하셨던


그 내용이 무엇인지 몹시 궁금하기도 하다. 희미하지만 이유는 알 것 같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은 긴 세월을 준비해 오셨다.


그 긴 세월의 준비 과정이 시작되는 시점에 있는 시간이 바로 광야의 시간이다.


광야는 참 외롭고 황량한 곳이지만 하나님의 기적과 함께하심이 가득한 곳이기도 하며

계시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귀가 있는 장소라고 여겨지는 곳이 바로 광야이다.


드디어 시험하는 자가 예수 앞에 나타나 말을 건넨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여기서 마귀를 본다.


마귀는 맨 먼저 예수께 다가가 그의 정체성(identity)에 관해 시험을 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럼에도 "아들이어든" 이라고 하면서 그의 정체성에 의문을 걸게 만든다. 이게 마귀가 하는 일이다.


마귀는 가장 흔들 수 없는 것을 흔드는 영적 실체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흔들어 놓았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에 금이 가도록 만들었다.


여기 본문에 그 마귀가 다시 예수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하나님의 아들인 분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라고 혼란을 불러 일으킨다.


이런 혼란은 예수께만 하는 짓이 아니다. 모든 신앙인들에게 동일하게 흔들어 놓는다.


"네가 만일 그리스도인이거든!"


그리스도인 맞는데 그리스도인이라면 ~을 해 보라, ~을 하는 게 옳으냐 라고 질문한다.


그래서 자격지심을 만들어 놓는다. 혼란을 심어놓는다. 이게 마귀가 하는 짓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양심의 소리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소리를 먼저 들어야 한다.


내가 부족하고 죄인이어도 우리의 자존감이 언제나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부심을 잃어선 안될 것이다.


죄를 짓는다 하여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은 내가 노력해서 만든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부여하신 자존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를 시험하는 마귀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귀신이 아니라 마귀다.


사단이나 마귀라는 호칭은 귀신보다는 확실히 우위에 있는 영적 실체를 의미한다.


내가 보기에 사단은 아주 중요한 순간에 역사하는 영적 실체이다.


 그리고 마귀는 질기도록 사람을 시험하거나 혼란을 심겨놓는 영적 실체이다.


 이 마귀는 사람의 약점을 기가 막히게 파악하고 있다. 마귀는 사람이시기도 한 예수께 시험을 한다.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시험을 받으신 그 광야에는 둥근 돌들이 많다고 한다.


그러니 생각해 보라. 40일을 주리신 예수께 그 둥근 돌들이 순간 어떻게 보였겠는가 말이다.


마귀는 그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해 보라고 한다. 돌이 어떻게 떡이 될 수 있는가?


중세에 납이나 돌이나 은이나 동이나 쇠가 연금술 과정을 통해 금이 될 수 있도록 제련했다는 연금술


이야기는 들어보았으나 돌이 떡이 되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다.


마귀는 철저하게 예수의 배고픔을 이용해 유혹한다.


첫째 아담에게도 먹는 것으로 유혹하더니만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께도 역시 먹는 것으로 유혹한다.


첫째 아담은 먹는 것에 대한 시험에 크게 실패했으나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이렇게 응수하신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놀랍게도 굶주리신 그 상황에서도 여전히 말씀을 기억하고 계셨다.


신명기의 말씀으로 마귀에게 응수하신다.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떡도 필요하다. 그러나, 떡이 전부는 아니다.


인류에게 떡의 문제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이다. 그러나, 영적 굶주림은 더욱 더 심각한 상황이다.


떡이 부요한 나라일수록 더욱 그렇다. 떡이 부요하고 넘치는 나라는 영적 공허감이 가득하다.


그들에게는 떡이 있으나 말씀은 없기 때문이다.


떡은 먹고 또 배고플 것이나, 말씀은 영원한 부요함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마귀는 예수의 육신적인 연약함을 이용하여 마술을 부리라고 권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호히 거부한다. 그러나, 이에 호락호락 물러갈 마귀가 아니다.


마귀는 예수님처럼 즉시 말씀을 인용하여 다시 시험한다. 거룩한 산 성전 꼭대기에 예수님을 데려간다.


이것이 실제인지 환상 속에서 일어난 일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마귀는 예수님께 속삭인다.


 "기록된 말씀으로 말하는 자여 그렇다면 이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 보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역시 동일하게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라는 전제를 단다.


예수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때가 이르기까지 본인을 인자라고만 말씀하셨을 뿐


당신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명의 때가 찼을 때 그리 말씀하셨다.


그 분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가장 겸손하게 행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특권을 함부로 행하지 않으신다.


특별히 당신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됨이라는 권리를 사용하시지 않는다.


그것은 십자가에 죽으실 때도 마찬가지다.


끝까지 하나님의 아들로 보호받으실 수 있으셨으나 끝까지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포기한 체


인간 예수로 십자가에서 죽어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예수를 더욱 더 높여주셨다.


그리스도인 이라는 호칭은 명예직도 아니고 목사나 장로라는 호칭 역시 세상이 부러워하는


그런 호칭도 아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그런 호칭을 들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부리려 하는가?


자칭 그런 권세를 이용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누리려 하는가?


이거 다 그릇된 생각이며 심판의 자리에서 심판대에 오를 짓이 아닐 수 없다.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져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 아닌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성전에서 뛰어내리시면 하나님이 천사들을 명하여 그 아들을 보호하실


수 있으심은 당연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사람이든 마귀든 그 중심을 헤아리신다.


예수님은 마귀가 결국 그런 유혹을 통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려는 것을 파악하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마귀도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이단들은 모두 다 말씀을 인용하면서 자신들의 이론을 정당화하려 한다.


그러니까 말씀 인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얼마든지 말씀을 자신의 사리사욕에 맞도록 정당화할 수 있는 게 인간이며 이단의 특징인 것이다.


오늘날 말씀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십일조 바쳐놓고 나를 축복하시는지 안하시는지 좀 보자


그런 심정으로 십일조 감사헌금 바치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말씀이 구약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도 분명히 말하지만 한 번으로 족하다.


한번은 미숙한 마음으로 그리할 수 있지만, 두번 세번 그렇게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신앙인의 자세


는 아닌 것이다.


말씀은 순종하라고 주신 것이지 내 사리사욕 채우라고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돌맹이를 떡덩이로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것


성전에서 떨어졌을 때 천사들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것


이것이 다 예수께 가능한 일이었으나 예수는 철저히 이 두 가지 일을 거절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모두 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기애적 인격장애를 가진 자들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또 그런 이들이 직분자가 되면서


얼마나 집요하게 자기애적으로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국가 조찬 기도회라는 것을 싫어한다. 그게 진정 하나님을 위해 한 기도회인가?


권력자, 정치꾼들을 위한 기도회는 아니었나?


수 억원을 들여서 살아있는 권력을 찬양하는 그런 행동을 하는 게 애국일 수는 있으도 신앙일 수는


없다. 큰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가? 거기서 해도 되지 않을까.


도대체 하나님을 뭘로 보고 그런 짓을 하는가? 그 자리의 진정한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가?


사람이지 하나님인가? 이게 다 자기애적인 인간들이 좋아하는 짓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두 다 말씀을 인용하여 마귀의 유혹을 쳐 버리신다.


이도 저도 되지 않다보니 마귀는 최후의 수를 쓴다.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예수님 당시 지극히 높은 산이 어떤 산인지는 모르겠다.


현실적으로는 에베레스트 산이 전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인데 그 산 밑에는 천하 만국이 보이지는


않으니  아마도 천하 만국이 보이는 산 위로 예수님을 데려간 것 같다.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은 아마도 대단했을 것이다.


아마 보통 인간이라면 보자마자 마귀에게 넙죽 절하고 모든 걸 할테니


저 영광을 내게 주소서 했을 것이다.


마귀는 세 번의 시험을 하지만 진짜 마귀의 의도는 세번째 시험에서 드러난다.


"너 내게 경배해 봐"


이거다.


마귀도 하나님처럼 경배를 받기 원하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과거 영화 "300"을 떠 올린다.


폐르시아의 절대 군주이며 신이라 불리는 크세르크세스는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에게


나의 부하가 되라고 명한다.






그러자 레오니다스는 고개를 숙이는 척 하다 크세르크세스에게 창을 던져 그의 얼굴에 상처를 낸다.


그리고 당당하게 전쟁을 선포한다. 한번 해 보자는 것이다. 전률이 밀려오는 장면이었다.


마귀는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 자기에게 경배하라고 유혹한다.


대신 모든 영광을 다 가지라고 말하면서.


그러나, 예수님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소리치신다.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그러니까 신앙의 핵심은 결국 경배의 문제다.
 
누굴 주로 모시며 누굴 경배하느냐는 것이다.


대신 하나님만 주로 모시고 경배하면 세상 모든 영광을 모두 다 잃을 수 있다.


그게 바로 초대교회 교인들의 삶이었다. 카타콤을 가 보라. 할 말을 잃는다.






어떤 카타콤은 자그만치 300년 이상을 땅 속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살았던 흔적이 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오늘 날 한국교회 교인 숫자는 아직도 거품이 많다.


목을 내 밀라 죽이겠다고 할 때 죽겠다 목 내밀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도 경배하고 세상 영광도 경배한다는 것이다.
 
마귀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팔아치우면서 말이다.
 
마귀는 그렇게 경배를 받을 때 어떤 심정이 들겠는가!
 
굴종하는 자를 비웃듯 바라볼 것이고, 마귀에게 경배하는 자는 세상 영광은 얻을 수 있을지 모르나
 
결국 남는 건 하나 뿐이다.
 
비참.
 
결국 마귀가 보고 싶은 건 그 비참함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 세 가지 시험을 절대적으로 승리하셨다.


그가 바란 영광은 십자가에 매달리는 하나님의 영광, 아버지의 영광이었지 세상의 영광이 아니었다.


이 세 가지 시험은 여기서만 끝나지 않으며 모든 세대에게 동일하게 임한다.


그래서 이 시험은 지금도 우리의 삶에서 끊이지 않는 시험으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있다.


세상의 삶자체가 광야의 삶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