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이 낳은 철도왕 ‘밴더빌트’뉴욕 여행 중에 한 번은 꼭 들려보는 곳 ‘그랜드센트럴역’. 우리로 치면 서울역사 같은 건물.
세계 최대 기차역. 플랫폼 44개, 승차 트랙 64개로 세계 어느 역사보다 규모가 크다. 유럽 왕이나 귀족들이 사는 궁궐 같은 보자르 양식의 건물이다. 작년에 연간 관광객 2000만 명이 넘었다. 1913년에 건립되었으니 이미 100년이 넘었다. 이 기차역을 개인 회사가 지었다. 사회 기반 시설을 개인 회사가 지은 것은 우리에게는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대다수 국가들의 경우 철도는 국가가 운영한다. 당연한 생각이다. 국가 기간 산업이고 시설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좀 다르다. 미국의 기업과 사회는 개인 구조로 되어 있다. 지금이야 대부분 주식 상장으로 인하여 주주 구성이 다양화되어 있지만,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대체적으로 개인들이 회사의 모든 것을 운영하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면 지금도 미국 프로 야구단은 회사가 아닌 개인들이 갖고 있다. 미국의 웬만한 회사 이름도 대부분 개인 이름인 고유명사로 되어 있는 것도 그런 연유다. 뉴욕 여행 중에 한 번은 꼭 들려보는 곳 ‘그랜드센트럴역’은 밴더빌트 가문의 기업이 지은 건물이다. ⓒ곽용석뉴욕의 관문 ‘그랜드센트럴역’ 지은 갑부그가 사망할 당시인 1877년 그는 미국에서 최고 갑부였다. 오늘날의 미국의 모습을 만든 뉴욕이 낳은 또 하나의 미국 최고 기업가 ‘코르넬리우스 밴더빌트’. 그는 1794년 뉴욕시 맨해튼 아래에 있는 섬, 스테이튼 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배 한 척으로 뉴욕항을 오가는 여객선 페리 사업인 증기선 여객 회사를 차렸고, 허드슨 강의 항만 운항을 점차 손아귀에 넣는다. 그의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단순한 성격이었고, 어머니는 근면, 성실, 검소했다. 그런 성품을 각각 이어받은 그는 11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가 하는 여객 운항 사업에 참여한다. 16살에는 아버지와 동업 형태로 참여한다. 맨해튼과 스테이튼 섬을 오가는 돛대 달린 여객선 2척 사업. 그의 역사적인 사업은 그렇게 시작된다. 공격적 마케팅과 민첩한 거래, 그리고 가격 할인 정책을 편다. 그러한 전략은 시장에 제대로 먹혔고, 그의 사업은 순풍이었다. 이러한 사업 모토는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그 첫 해에 1000달러 이상을 번다. 지금 가치로는 대략 수십 억원 정도다. 18세에 그는 미국 정부와 1812년 전쟁 당시의 전초 기지인 건설 계약을 맺을 정도까지 대형 선박 운항사로 키운다. 전쟁 후 그는 보스턴과 델라웨어를 운항하는 여객선 사업에도 참여한다. 그 시기 그의 이름에 벌써 해군 제독이라는 별명이 붙는다. 해군에 입대한 적도 없던 그였다. 1813년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촌과 결혼한다. 13명의 자녀를 둔 그는 사업이 성공하면 할수록 혹독한 아버지와 잔정 없는 남편 이미지로 굳어진다. 아들은 3명 이상 낳기를 원했으며, 딸에 대해서는 인간 이하 취급을 하는 여성 혐오자기도 했다. 그의 사업은 새로운 기술의 발전과 그 시장 확대성을 내다보며 1817년 잇달아 대형 운항 파트너들과 손잡고 사업을 키워나간다. 대형 회사들의 틈바구니에서 공격적인 마케팅과 할인 가격 정책으로 경쟁사들을 하나씩 흡수해 나간다. 나이 칠십에 철도왕으로 등극결국 경쟁사들은 두 손 들고 그에게 사업체를 넘겨주고 업계를 떠난다. 허드슨 강의 배들을 모두 좌지우지하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도 아픔이 있다. 부 자체만으로는 명예를 가져다 주지는 못하나 보다. 당시 상류 사회의 엘리트들은 그를 약간 무시하기 시작한다. 제대로 정식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고 그의 필체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가 쓴 글의 문법도 최악이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는다. 부에 대한 과시욕을 무시했으며 단순하고 정제된 생활을 해나간다. 꿋꿋하게 자기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1851년 그의 여객 사업은 확장 일로를 걷는다. 뉴욕과 샌프란시스코를 잇는 사업을 개척한다. 니카라과 해협을 지나는 노선이다. 타이밍이 적절했다. 서부 금광 개척 시대를 맞아 그의 여객사업은 골드러시를 맞이한다. 금을 캐서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청바지 장사가 돈을 번 것처럼, 핵심 사업보다는 관련 사업에서 대박이 난 것이다. 말콤 글래드웰이 말하는 ‘아웃라이어’에 해당하는 셈이다. 남북 전쟁 당시에는 애브라함 링컨의 요청으로 북군인 유니언 해군에 그의 대형 함대를 기증하기도 한다. 이후 그는 대단한 결정을 한다. 1864년 3000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 사업인 해운 사업을 정리하고 철도 사업에 손을 댄다. 칠십에 이르는 나이에 그는 철도 사업에 온 정력을 쏟는다. 그의 사업 수완은 철도 사업에서도 똑같이 발휘된다. 공격적 마케팅, 재빠르고 고급스런 서비스와 가격 대폭 할인 전략으로 경쟁사들을 하나씩 거둬들인다. 결국 뉴욕과 시카고를 연결하는 노선을 손에 넣는다. 미국 철도사에 있어서 그는 ‘철도왕’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1871년 그는 철도 제국을 완성하며 뉴욕의 그랜드센트럴 역사를 건립하는 과정에 까지 이른다. 물론 그때 지어진 역사는 철거되었지만, 당시에 초대형이면서 혁신적인 역사로 유명한 건물 유적을 만들게 된다. 트랙과 승차홈도 유리 천장으로 만들었으며, 플랫폼에 승강기 초기 모습형태를 꾸며 놓았다. 또한 기차들은 지하로 운행하도록 건설해, 소음과 매연을 줄여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철도 시스템인 셈이었다. 지금도 그러한 방식의 시스템은 그랜드센트럴역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기부에는 인색했던 ‘밴더빌트’좀 알려진 기부라 한다면 100만 달러를 들여 테네시주에 있는 밴더빌트 대학을 만든 것 정도(?)다. 1876년 병마가 찾아와 8개월 간의 투병 기간을 거친 후 1877년 심장 질환 등 복합 증세로 사망한다. 현재 환산 가격으로 그가 남긴 재산은 2000억 달러(한화 약 250조원)에 달한다. 스탠다드오일 회사 오너, 존 록펠러 다음인 미국 역사상 두 번째 부자인 것이다. 그의 후손 중에 유명한 사람으로 5대손인 디자이너 ‘글로리아 밴더빌트’와 그녀의 아들인 ‘앤더슨 쿠퍼’ CNN 앵커가 있다. 카네기, 록펠러, 그리고 밴더빌트, 이들의 공통점은 ‘피도 눈물도 없이’ 경쟁 업체를 인수, 해당 업계를 독점하며 소위 독점 자본주의의 폐해를 미국인들에게 강하게 각인 시킨 점은 분명 존재한다. 당연히 노동자들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했으며, 아동 노동 등의 각종 사회 문제가 속출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한 국가의 파워를 키워 나라를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대자본의 축적이 필요했다. 특히 신생 국가인 미국의 경우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산업 자본의 힘과 국가 형성의 틀을 만들기 위한 힘이 필요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있을까. 그들이 개인 자산 축적 이외에 관심이 없었다면 그렇게 평가할 수 있으나 그들 나름의 개인 사생활로 들어가 보면 정제되고 근검하고 겸손한 생활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들의 무자비한 경쟁사 인수와 독점, 그리고 비정한 사업 전략만으로 낮게 평가할 수만은 없는 이유이다. (헨리 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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