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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속 신분차별 조선3성장군

GODblessus 2023. 9. 23.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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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출신 일본 육군 중장, 홍사익

안녕하세요. 제10기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 이윤태입니다. 오늘날 남북한 사회에서 한민족은 일본의 식민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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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출신 일본 육군 중장, 홍사익

 
 대한민국 통일부  2017. 8. 26. 20:33
 
 
 

1940년대 징병에 끌려가는 한 조선 청년이 가족과 함께 일장기를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동아일보)


안녕하세요. 제10기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 이윤태입니다. 오늘날 남북한 사회에서 한민족은 일본의 식민 통치에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은 '피해자' 로 여겨집니다. 물론 크게 역사적 사실에서 어긋나는 인식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실제 과거 역사는 이런 단편적인 인식 보다도 훨씬 복잡합니다. 왜냐하면 1930년대 일본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된 이후, 일본의 '이등신민'인 조선인보다 열등하게 여겨졌던 한반도 밖의 '삼등신민' 들에게 조선인들은 일본인 못지않은 가해자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만주사변 이후 중국으로 건너간 5만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은 일본 시민권을 악용하여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에서 중국인들을 상대로 아편을 팔았고,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과 같이 참전한 조선인 군종병(이들은 1944년 조선인 징병제가 실시되기 이전에 임금을 받고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가한 조선인들이었습니다)들의 포로 학대는 그 악명이 높았습니다. 전쟁 이후 일본군에 의해 포로 생활을 했던 연합국 포로들은 입을 모아 일본군보다 조선인이 더 미웠노라고 울분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일제의 가장 큰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신민으로서 일제의 일부 였던 조선인들은 이중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중적 정체성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생을 산 친일파가 있습니다. 바로 조선인 출신 일본 제국 육군 중장 홍사익입니다.
 

조선의 평민에서 일본의 장군으로 
1920년 12월 16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홍사익. 일본육군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는 내용이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홍사익은 청년 시절 군인이 되기 위해 상경해 대한제국 육군유년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후 한일 병합이 이뤄지면서 한국인 생도 전원은 모두 일본군으로 편입 됐고, 울분을 참지 못한 홍사익의 조선인 동기생들 중 많은 이들이 퇴교를 선택합니다.
 
육군유년학교를 수료하고 사병 생활을 거친 홍사익은 일본 사관학교에 입학합니다. 일본 사관학교를 졸업할 당시 그의 성적은 전체 22등으로 유학생 13명 중에서는 수석이었습니다. 홍사익은 졸업 이후 줄곧 일본 최고 엘리트 부대였던 1사단 1연대에서 근무했고, 1920년에는 일본 육군대학에 합격하면서 엘리트 코스를 이어나갔습니다. 결국 1923년 홍사익은 우수한 성적으로 육군대학을 졸업합니다. 36년의 일제 강점기 동안 영친왕, 이우 ,이건 같은 조선 왕족 3명을 제외하면 육군대학을 졸업했던 조선인은 그가 유일했다고 합니다.
 
중일전쟁 당시 그는 화북 지역에 부임하여 전투와 공작 업무를 도맡았습니다. 그가 벌인 전투에 피해를 입은 중국 항일 부대의 일원에는 김세광과 김학철 등 사회주의 계열 조선인 무장투쟁가들 또한 포함돼 있기도 했습니다. 다만 당시 화북지역에 거주 했던 조선인 문학 평론가 백철에 따르면 그가 화북지구의 사령관으로 있을 때 해당 지역의 조선인 이민자들은 그의 덕택에 일본인들로 부터 무시당하지 않고 어깨를 펴고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 관헌들 조차 조선인 홍사익이 화북지구의 사령관인 이상 조선인들을 '반도인'이라고 부르며 하대할 수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태평양 전쟁 당시 홍사익의 행적  
군복을 입은 홍사익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1944년 수세에 몰린 일본이 드디어 그동안 터부시 됐던 조선인 징병제를 실시하자 홍사익은 조선인 징병제야 말로 조선인이 진정한 일본 국민이 될 수 있는 계기이자 천황을 위해 보국할 수 있는 기회라는 내용의 논설문을 발표했습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 홍사익은 1944년 필리핀에 주둔한 일본 남방총군 총사령부의 병참 총감에 임명 됐고 10개월간 연합군 포로수용소 소장을 겸직 하면서 포로들을 감시했습니다. 같은 해 홍사익은 10월 육군 중장으로 진급 했으나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전세는 미국에 기울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 했는지는 몰라도 일제의 악행을 날카롭게 폭로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매일신보의 기자 김을한은 1944년 홍사익에게 탈영을 제안합니다.
 
그러나 홍사익은 그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현재 조선인이 이미 일본군에 의해 수십만 명이나 동원돼 있는데, 명색이 조선인으로서 일본군에서 최고 지위에 있는 자신이 일본을 배신한다면 일본군에 남아있는 조선인들에게 커다란 보복이 뒤따를 것이라는게 그의 거절 이유였습니다. 김을한 말고도 한국 광복군 측 인사들과 아들 홍국선조차 그에게 광복군 합류를 권유했지만 그는 앞서 언급한 이유로 끝까지 이런 권고들은 거절합니다.
 
일본 패망 직전 한 일본인 부관은 홍사익에게 장군님의 조국이 독립하는 것을 축하 드린다며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러나 홍사익은 난 여전히 제복을 입고 있다. 제복을 입고 있는 한 제복에 충성을 다할 것이라고 답하며 그가 일본 군인으로서 인생을 끝마칠 것을 암시 했다고 합니다.
 

조선인 홍사익, 일본군 전범으로서 사형을 선고받다
1946년 전법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홍사익(우측 끝) (사진 출처 : 위키백과)


홍사익은 필리핀의 산악지대에서 일본군을 이끌고 연합군에 대한 유격전을 벌이다 패전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종전 후 고향인 경기도 안성으로 돌아가 중학교 수학 교사를 하며 여생을 마치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포로수용소 소장 근무 당시 연합국 포로에 대해 불법처우와 포로학대, 살해원인 제공혐의로 필리핀 전범재판에 회부됩니다. 체포 직후 일본 국적을 포기 하라는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앞선 광복군 합류 요구와 마찬가지로 홍사익은 이를 거절합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적으로 학대를 지시하지는 않았지만 부하들의 포로 인권 유린 행위를 방조한 것에 대한 책임을 추궁 받았고 궁색하게 변명을 이어나갔던 수많은 일본군 전범들과 달리 자신에 대한 변론을 거부하고 침묵을 지켰습니다. 결국 그는 마닐라 국제 군사 재판에서 '포로학대 살해' 죄목으로 B급 전범으로 기소 됐으며 1946 4월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독립군이 된 홍사익의 일본 육사 동기생들을 중심으로 홍사익에 대한 구명운동이 전개 됐고 이들은 연합군의 사령관이었던 맥아더에게 탄원서를 올려 홍사익을 용서해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러나 연합군 입장에서 열악 했던 일본군의 연합군 포로 관리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일본군 고위 참모를 사면해주기는 힘든 노릇이었고 결국 구명 운동은 좌절되고 맙니다.  


광복군 사련관 지청천(좌), 일본군 중장 홍사익(우) (사진 출처:중도일보)


홍사익은 사형 판결에 대한 항소를 거부했고 사형 판결 확정 이후에도 담담했습니다. 오히려 교수형이 확정되자 그는 자신이 갑종에 합격했다고 외쳐 방청객과 미군 군법무관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습니다. 갑종합격(한국으로 치면 신검 1급을 뜻합니다)의 발음과 교수()합격이라는 일본어 발음이 비슷한 것을 이용한 언어 유희를 선보인 것이죠. 일본인 일본군 장성이었던 도미나가 교지가 전쟁 말기에 전원 옥쇄를 주창한 직후 도주했던 사실과 비교하면 홍사익이 얼마나 죽음에 초연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1946 9 26일 홍사익에 대한 교수형이 집행됐습니다. 그는 최후를 맞이하기 직전 참관인들에게 성서 시편 51편을 낭송해줄 것을 부탁합니다. 시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죄악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홍사익 외에 15명의 조선인 일본군 고위 장교들이 사형 처분을 받았고 홍사익과 함께 당일 교수형 혹은 총살형에 의해 사망합니다. 그는 태평양 전쟁의 B, C급 전범으로 지목된 일본군 전범들 중 유일하게 지도적 위치에 있던 한국인이었으며, 사망 후 그의 시신은 화장돼 미 해군에 의해 비밀리에 바다에 뿌려집니다. 홍사익의 유품은 그의 가족들에게 전달 됐고, 1966년 일본은 그의 위패를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 시켰습니다.


친일파인가 독특한 민족주의자인가
(사진 출처: 연합뉴스)


일본의 장군으로서 일본 제국을 위해 싸웠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 친일파였습니다. 비극적이게도 중일전쟁 당시 화북지대에서 일본군이 조선인이 포함된 중국 팔로군과 싸웠을 때 조선인이었던 그가 이끄는 일본군의 공격으로 많은 조선 출신 팔로군들이 부상을 입거나 전사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조선인 팔로군의 대다수가 나중에 북한의 인민군에 복역하여 남침에 앞장 섰으니 이들을 진압한 행위는 비판받을 필요가 없다는 한국 보수 진영의 의견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념과 상관없이 사회주의 계열 조선인 무장투쟁가들이 항일 운동에 적극적인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조선인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기회주의적 행태를 일삼았다는 친일파에 대한 선입관은 그와는 크게 부합하지 않아 보입니다. 일본의 장군이었으면서도 그는 창씨개명을 죽는 그날까지 거부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창씨개명이 강제적인 정책이 아니었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한 일제의 의도가 있었다는 학설도 있습니다그는 조선어 발음이 묻어 나오는 자신의 일본어 발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부대에서 언제나 나는 조선인 홍사익이다. 그러나 나는 천황폐하의 명령을 받드는 일본의 장군이다. 조선인에게 명령을 받는 것이 불만인 자는 앞으로 나오라!”는 머리말로 그의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조선인이라는 민족성을 끝까지 고수한 것은 그가 내선일체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독특한 신념의 결과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홍사익은 조선인이 일본에 협력하면 조선인들도 일본인만큼 동등한 국민으로 대접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 홍국선이 어린 시절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인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받은 후 그 서러움을 아버지인 홍사익에게 호소하자 그는 다음과 같은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홍사익과 그의 가족(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또 조급히 해결 되리라고 생각할 수도 없는 문제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 기회에 조사해왔지만 일본인과의 관계는 아일랜드인과 영국인 사이와 매우 비슷한 문제가 있다. 따라서 아일랜드인의 방식이 우리에게 참고가 될 것이다. 아일랜드인은 영국에서 어떤 취급을 받더라도 절대로 아일랜드인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를 소개할 때는 반드시 또렷하게 나는 아일랜드인인 아무개 올시다라고 말한다. 너도 그렇게 하여 어떤 때에나 반드시 나는 조선사람 홍국선입니다라고 말하여 결코 자기가 조선 사람이라는 말을 생략 해서는 안된다.“
 
이런 예화로 미뤄 볼 때 홍사익은 조선인의 태평양 전쟁 참전과 같이 적극적으로 조선인이 일본인에 못지 않은 일본 국민임을 입증하는 것이 조선인의 권리 증진에 기여할 길이라는 생각을 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대한제국의 멸망과 3・1운동을 기점으로 홍사익의 동기 였던 많은 조선인 일본군 엘리트들이 탈영을 하여 독립운동 대열에 합류 했던 것과 달리 그는 일본군에 잔류했습니다. 일본군 육사 44기로 홍사익의 육사 16년 후배 였던 이형석은 홍사익이 자신에게 한 고백을 언급하며 홍사익이 넉넉하지 못한 가정 형편 때문에 결국 군인을 그만두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몰라도 홍사익은 조선인 출신 일본 장교들의 친목모임을 통해 일본군을 탈영한 동료 조선인 장교들의 가족들의 생계를 돌봐주었으며 지청천을 비롯한 일본군 출신 독립군들과 연락을 지속했습니다. 물론 가정 형편 때문에 일본군에 잔류한 사실을 통해 그를 기회주의자로 규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군 장성으로서 일본의 패망이 임박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임에도 전쟁 말기에 자신의 탈영 후에 일본군에 잔류한 조선인에 대한 보복을 우려하여 그가 광복군 합류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이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가 진정 기회주의자였다면 태평양 전쟁 말기에 수 차례의 탈영 요구를 거부하기는 커녕 요구가 있기 전에도 먼저 탈영 의사를 광복군에 피력했을 것입니다.  


조선인 가미카제 탁경현. 식민지 교육으로 한글이 익숙하지 않아 어머니가 쓴 한글 편지를 제대로 읽을 수 없어 울먹였다는 그는 강제로 징집 됐지만 이왕 온 이상 "일본인이 조선인을 깔보지 못하도록" 담담하게 전사할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사진 출처: 오마이뉴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70년이 지나 독립된 조국을 당연시하는 후손들의 입장에서는 홍사익은 분명 독립군과 교전을 벌이고 포로수용소의 연합군 학살을 묵인 했던 친일파요, 전범입니다. 그러나 식민지 통치 하에서 일본인들에게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당시 많은 조선인들에게 홍사익은 자신의 힘으로 일본인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최고의 위치에 올랐던 조선인, 조선인의 우수함을 입증한 장본인으로 인식 되기도 했습니다. 한 사람이 친일파인 동시에 민족의 자랑으로 여겨지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그는 사욕이 없고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한 좋은 군인이었지만 민족주의적 입장에서는 분명 '반민족행위자' 였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해 보입니다. 이런 그가 자기 나라 국민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정상적인 국가에서 태어나 군인의 길을 택했다면 분명 조국에 충성하고 부하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훌륭한 군인이 됐을 것이란 점입니다.

이상 제10기 통일부 대학생기자단 유니콘 이윤태였습니다.

[참고자료]

BBC : World War2, People's war (http://www.bbc.co.uk/history/ww2peopleswar/stories/94/a2819694.shtml)
박강 교수, "몽롱하게 취한 조선...하루 아편 판매량 3만인분 달했다" (동아일보/2013/11/22)
위키피디아
야스쿠니 신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 (동아일보/201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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