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외교,역사

북한 쿠테타 레드오션

GODblessus 2023. 12. 7. 15:46

프룬제 군사대학 쿠데타 모의 사건

최근 수정 시각: 2023-11-28 02: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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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쿠데타·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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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과정

2.1. 배경

2.2. 시도

2.3. 진압

2.4. 이후

3. 여담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2.1. 배경[편집]


냉전 시절 북한공산권의 지도국가 소련에 수많은 유학생을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대체로 북한에서도 상위계층 출신이었고 김일성관심도 남달라서 거액의 장학금을 받는 등 많은 지원을 받았다. 한편 소련도 북한에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세력을 형성하기 위해서 북한 유학생들을 상당히 우대하였고 이 중에서 일부는 KGB가 연일 백인 미녀들과 술을 대 주면서 자신들의 정보원으로 포섭했다고 한다. 당시 북한의 소련 유학생들은 이런 양쪽의 지원에 힘입어서 상당히 여유로운 생활을 했고 수완이 좋은 일부는 장사에도 손을 대서 꽤 많은 을 만졌다고 한다.

KGB에 포섭된 소련 유학생들은 현지 정보기관과 결탁해 북한 내부 정보를 유출했고 소련북한에서 급변사태가 생기면 이들을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킬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소련은 단계별로 돈을 지불했고 이를 거부하면 낙제생으로 만들고 테러 조직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씌워 재판정에 세웠다.

한편 소련에서 유복한 삶을 살던 엘리트 유학파 장교들은 북한에 돌아와 매우 열악한 처우를 받게 되었고[1] 이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이러면서 자기들끼리는 러시아어로만 대화하는 등 소련 유학파 출신들이 모이는 일종의 이너 서클이 생겨났는데 여기에는 1950~1960년대 소련에서 유학했던 1세대 유학파들부터 20대 젊은 층까지 있었다고 한다.

1991년김일성김정일에게 최고사령관 직을 물려주자 사회주의 체제에서 유례없는 권력 세습에 크게 반발한 이들은 쿠데타를 준비했는데 1993년 김정일을 제거하고 김일성을 국가상징으로 내세운 다음에 주체사상으로 왜곡된 북한의 사회주의 노선을 정통 사회주의로 개조한 후 남한을 침공할 계획이었다고 한다.[2]

2.2. 시도[편집]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군사정변 모의는 최룡해매부였던 홍계성이 이끌었다. 유학 생활을 마치고 조선인민군 부총참모장으로 승진한 홍계성에게 1992년 최고사령관 자리에 오른 김정일이 직접 상장견장(계급장)을 달아 주었다.

홍계성과 함께 김일성의 외가 친척이었던 인민무력부 작전국 부국장 강영환도 쿠데타의 핵심 인물이었고 여기에 만경대혁명학원을 졸업하고 프룬제 군사대학에 유학한 인민무력부 작전부처장과 전투훈련국장 안종호도 합세했다.

그들은 조선인민군 창군 60주년이 되던 1992년 4월 25일 열병식 주석단에 있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탱크로 제거하는 계획을 세웠으며 프룬제 유학파 출신의 사단장 5명이 거느린 부대도 쿠데타 계획에 합류했다. 열병식에 동원된 전차는 프룬제 유학파 출신 김일훈 소장이 관할하는 평양방어사령부 탱크사단 소속이었다. 그런데 김일성의 고종사촌인 인민무력부 국장 박기서가 평양방어사령부의 탱크를 동원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대신 인민무력부 직할부대의 탱크가 열병식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렇게 초기 쿠데타 계획은 실패했다.

2.3. 진압[편집]


러시아소련에서 공부한 유학생들을 통해 이런 사실을 미리 파악했다. 첫 쿠데타 음모가 실패하자 기존 KGB의 한 간부였던 사람이 당시 러시아 대사였던 손성필에게 쿠데타 모의를 고발했다. 김정일은 프룬제군사아카데미 유학생 출신들이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들"이라고 분노하면서 조선인민군방첩기관인민군 보위국[3]에 이들을 무자비하게 소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993년 2월 8일 인민무력부 8호동 회의실에서 중대회의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유학생들이 도착하자 인민군 보위국 국장 원응희가 지휘하는 작전조를 투입했다. 총참모장 최광보위국장 원응희가 주최한 이날 회의에서 최룡해의 매부였던 인민군 부총참모장 홍계성 상장과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 부국장 강영환 중장, 재정국장, 통신국장, 교육국장 등 장령급 지휘관 7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때부터 1998년까지 5년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유학생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인민무력부 총정치국과 총참모부는 물론이고 각 군단, 사단, 여단의 모든 소련 유학생 출신들이 모두 조사를 받았고 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관 무관 김학산 중장과 부무관이었던 최수연 대좌도 1997년에 체포되었으며 1993년 말 김책공군대학에서 재직하던 유학생 17명은 평양역 부근에서 크게 저항해 인민군 보위국 1개 중대가 동원되어 겨우 제압했다.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보위국은 북한의 주요 도시들을 검열했는데 1998년 량강도 혜산시에서만 2백여 명의 당, 행정, 사법기관 간부들을 공개처형하거나 비공개로 살해했다. 당시 량강도 보안국 리성훈 수사처장은 망치로 살해당했다.

2.4. 이후[편집]

 

 

조선인민군 보위국은 이 사건과 제6군단 쿠데타 모의 사건을 신속히 처리하고 군부 내의 반김정일 세력을 뿌리뽑은 공로로 보위사령부로 승격되었으며 보위국장이었던 원응희는 보위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중장에서 단숨에 대장으로 진급했다.[4]

이 사건으로 장령 30여 명과 좌급 군관 100여 명, 위급 군관 70여 명 등 프룬제 군사대학 유학생 출신 도합 200여 명이 총살되었으며 살아남은 일부 유학생들은 군복을 벗은 채 지금도 북한 당국의 감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사건 이후 북한은 외국에 군사 유학생을 보내지 않고 있다.

3. 여담[편집]


  • 2011년 초에 프룬제 출신 장교 한 명이 유학 당시 2000달러를 받은 사실을 숨겨 오다가 결국 자살을 택했는데 북한 핵이론의 선구자로 알려진 도상록친척이었다. 한편 이 사건 이후 개방·개혁 의식을 가진 군 장교들은 자취를 거의 감추었다고 한다. 오극렬 국방위 부위원장과 김영춘 인민무력부장도 프룬제 출신이지만 전혀 다른 노선으로 김정일 일가에 충성하여 살아남았다.
  • 2020년 9월 주성하 기자는 프룬제 쿠데타설은 과장되었다는 이야기를 유튜브 채널로 밝혔다(영상). 그의 주장에 따르면 실제로는 소련 붕괴 후 북한으로 모두 소환된 이들이 자신들에 대한 처우에 불만을 터트렸는데 소련으로 유학을 갈 수 있을 만큼 고위층 출신들이라 불만을 공공연하게 표출했고 이에 김정일이 이들을 숙청한 것이라고 한다. 즉 구체적인 실행의도나 계획은 없었지만 안 그래도 감시체제가 철저한 북한에서 이들이 자기들끼리 술자리를 갖고 거기에서 대놓고 처우나 세습문제 등을 비판하며 불만을 터트림을 보고받고 김정일이 미리 싹을 자른 것이다. 이후 여론이 안 좋아지자 김정일의 숙청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던 이봉원 대장을 남쪽의 간첩이라며 처형했다고 한다. 일단 여러 증언을 보면 쿠데타의 유무를 떠나서 이 시점에서 러시아 유학파 장교들을 보위부에서 연일 잡아서 죽인 것은 사실로 보인다. 보위부 운전병으로 근무했던 탈북자 구대명도 자신이 프룬제 유학파 장교들을 실어나른 것을 기억했다.
  • 소련 공산당이 붕괴되고 러시아에서도 자본주의 러시아 연방 정부가 들어서면서 프룬제 군사대학은 러시아 합동군사지휘참모대학교로 변경되었고 외국군 위탁교육을 동맹국가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에도 확대했는데 현재는 북한군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군 장교들이 교육을 받는다. 만점 사례가 종종 나오므로 우수하게 인정받는 듯하다. 방공 분야 만점 졸업 사례 1, 사례 2, 잠수함 분야 최우수 졸업 사례

4. 관련 문서[편집]


[1] 소련과 북한은 같은 공산권 국가였지만 사회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소련은 사회주의 독재 체제가 아무리 극에 달해도 북한급으로 폐쇄적이지는 않았고 암암리에 서방제 물품들이 들어올 정도였지만 북한은 1970년대부터 이미 김일성 유일 지배체제가 공고화되면서 사회 분위기가 매우 경직되어 있었다.

[2] 물론 고난의 행군이 있었던 90년대 북한의 경제 사정을 고려하면 예상 가능한 결과는 당연히 북한의 멸망밖에 없다. 대외적 여건을 봐도 이미 동유럽 공산 정권은 무너진 지 오래였으며 소련마저도 1991년 12월 붕괴됐다. 중국도 1992년 한중수교를 앞둔 시점이었으므로 대한민국을 굳이 자극할 이유가 없었다.

[3] 남한으로 치면 군부독재 정권 시절 국군보안사령부 정도에 해당한다. 국가안전보위부와는 다른 기관이다.

[4] 북한군에는 중장 다음이 대장이 아니라 상장이라는 계급이다. 마찬가지로 상장 다음이 대장. 따라서 중장이 대장이 되었다는 것은 북한군에게는 두 계급이 오른 것이다.

1. 개요

2. 정황

3. 실존 여부

1. 개요[편집]


1995년 북한 6군단이 쿠데타를 모의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었다고 알려진 사건.

2. 정황[편집]


사건 당시 북한 6군단은 함경북도 지역을 방어하는 향토군단으로서 청진시 라남구역에 사령부를 둔 중국 접경지대의 수비군으로 휘하에 보병 3개 사단, 포병 1개 사단, 방사포 4개 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94년 여름에 김일성사망하고 김정일의 승계가 안정되던 와중에 북한의 권력이 허점을 보이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정치장교 장성(중장)은 체제를 뒤엎기로 결심했다.

사실 공산국가의 정치장교 제도는 지휘관의 반란을 막는 통제제도였으며 거기다가 조선인민군의 지휘 체계는 정치장교를 감시하는 보위국 장교까지 만들어 넣은 이중감시 구조였는데 정작 정치장교와 보위국 장교가 손을 잡고 반란을 계획했다는 것이다. 사실 50년 이상 유지된 체제하에서는 모두 다 북한 정권 아래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인물들이었으니 정치장교나 보위국 장교라고 해서 군 지휘관보다 북한 정권에 대해 더 충성심이 높은 게 보장되지 않는다. 애초에 북한이 군 지휘관 + 정치장교 + 보위국 장교 제도를 운용하는 이유는 군의 지휘구조를 복잡하게 하고 이들간의 상호 감시 체제를 구축하여 반란 등의 행동을 위한 의견 일치를 어렵게 만드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사건도 2명 사이에는 의견 일치가 이뤄졌지만 3명째가 동의하지 않아서 적발되었다.

1995년 초 국가안전보위부에서 라남구역 라성동을 담당하는 한 요원이 여성 정보원으로부터 한 건의 정보를 받았는데 내용은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한 중장[1]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체제를 뒤엎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자료를 접수한 라남구역 국가안전보위부 부장은 이 사실을 함경북도 국가안전보위부 부장에게 보고했다. 함경북도 국가안전보위부 부장의 지시를 받은 도 국가안전보위부의 반탐[2]처 처장은 현지로 가 그 여성 정보원을 만났지만 쿠데타를 준비한다고 알려진 6군단 정치부 군관의 말이 취중에 한 말로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정보자료가 현실성이 없어 보이는 데다 도 국가안전보위부의 관할 밖인 군 부대라는 점을 고려하여 도 국가안전보위부 반탐처 처장은 '허위보고'로 속단하고 도 국가안전보위부장에게 보고 한 뒤 자료를 서류함에 넣고 잊어버렸다.

한편 정보를 제공한 그 여성 정보원은 분명 뭔가 문제가 있는데 반탐처 처장이 속단했다고 판단하고 이 사실을 조선인민군 보위국에 보고하기로 결심했지만 6군단 보위국이 미심쩍었던 그녀는 평양에 가서 지인들을 통해 어렵사리 조선인민군 보위국에 근무하는 사람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보위국장을 맡고 있던 원응희 중장은 즉시 수사팀을 파견했다.

수사 결과 6군단 정치위원과 군단의 포병부 사령관을 비롯해 정변을 준비하던 군관들은 군수물자 보장을 위한 외화벌이를 명목으로 많은 자금을 마련했고 준비가 완료되면 정변을 일으키려고 했다고 한다. 북한 사회에서는 이 사건이 단순한 외화벌이 빙자 비리사건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후의 군부대 교체이동과 관련 군관 대부분을 전역시킨 것을 보면 매우 중대한 사건으로 보인다.

김정일은 제2의 6군단 사건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국가안전보위부 산하의 국경경비대, 해안 및 철도 경비대와 인민보안부의 일부를 인민무력부에 통합시켜 통일된 지휘체계를 세웠고 주요 군부에 대한 감시를 더욱 철저히 할 것을 명령했다.

2020년 10월 10일 북한 열병식 때도 6군단이 해체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3. 실존 여부[편집]


사실 별 거 없었고 그냥 군단장과 정치장교 사이의 알력 문제였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우선 쿠데타 시도라기에는 동기와 실제 계획이 어땠는지 너무 불분명하고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추정되는 설로는 6군단이 반란을 일으킨 후 함경북도를 기반으로 평양에 대한 내전을 일으키거나 대한민국 국군이나 미군을 청진항에 끌어들인 다음 특수부대가 평양에 잠입하여 정권을 탈취하는 두 가지 시나리오가 있는데 모두 비현실적이다.

6군단의 전력은 인민군 내에서도 열악한 수준인 데다 함경북도의 생산력을 감안하면 전쟁을 벌여도 당연히 평양의 중앙 정권과는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며 쿠데타에서 중요한 것은 언론의 장악과 선전을 통한 지지의 확보인데 북한의 모든 매스미디어는 평양이 장악하고 있으며 설령 국지적인 지지를 확보한다 하더라도 전체적인 호응이나 혼란을 야기할 역량이 되지 못한다. 한국군이나 미군이 육로로 연결된 강원도(북한)나 황해도도 아니고 해로와 항공로를 동원해야 하는 함경북도에 진입한다는 것은 더더욱 비현실적이다.

게다가 수 년간 나온 탈북자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대규모 반란 사건에 대한 처분치고는 북한 기준으로 허술한 측면이 있다. 당시 전역자들이 탄광으로 끌려갔다는 것은 원래 인민군 전역자를 아무 데나 복불복으로 끌고 가는 인민군 기준에서 비일비재한 일이다.[3] 게다가 당시 6군단에 있었고 숙청되어 싹 쓸려야 했던 좌관급 장교들마저도 생존했다는 증언이 있으며 처형당한 경우도 가족들은 함경북도 국경지대로 추방당하는 선에서 끝났고 반란을 모의했다는 정치장교 중장의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반란사건이든 단순 알력사건이든 1개 군단이 해체된 사건에서 주모자에 해당하는 사람이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는 건 이상하다. 더구나 탈북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사람이 김일성의 신임이 두터웠다는데 그런 사람이 이름조차 없다는 게 아무리 북한이지만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자세한 정황은 북한이 붕괴된 후에야 밝혀질 것이지만 현재 확실한 것은 "1995년에 모종의 이유로 군단장 살해 사건이 발생했고 그로 인해 김영춘 주도 하에 6군단이 전격적으로 해체되었다"는 것 뿐이다.

김길선 기자와 전소현은 6군단 사건은 군사반란이 아니라 단순히 국경지역에서 자본주의를 맛보고 돈을 국가에 바치지 않고 중간에 가로채가는 부대를 해체한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하였다.

주성하 기자는 6군단 반란 모의 사건이 김일성으로부터 국방위원장 자리를 물려받았지만 군대도 안 갔다 와서 군에 대한 영향력이 매우 약했던 김정일이 군부를 장악하고자 한 조작된 사건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링크 하지만 김정일이 군부에 영향력이 약했단 주장은 걸러서 들어야 한다. 김정일은 70년대에 조직지도부를 장악하고 군부의 수장 오진우를 구워삶으면서 군부 요직에 자신의 사람들을 다 심어 놓고 있었고 90년대 초반에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국방위원장 자리를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 물려받으면서 군 통수권은 김일성이 죽기 전부터 행사하고 있었다. 김평일이야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일개 장교에 불과했다.

[1] 북한 계급 상에서의 중장은 별이 2개의 투스타로 대한민국 국군의 소장에 대응한다.

[2] 북에서는 '방첩' 업무를 '반탐'이라고 부른다.

[3] 북한 용어로 무리배치라고한다. 현재까지도 최고지도자의 핵심사업으로 지정되면 제대군인에 대한 무리배치가 이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