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야노의 Q.T:매일성경] 히브리서 12:14~29(6/24:월)

GODblessus 2023. 12. 3. 09:44
[야노의 Q.T:매일성경] 히브리서 12:14~29(6/24:월)
 야노  2019. 6. 24. 7:03
[야노의 Q.T:매일성경] 히브리서 12:14~29(6/24:월)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2019년 6월 24일 월요일 히브리서 12:14~29
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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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함과 거룩함
이전 본문에서 믿음의 경주와 이를 위한 징계와 연단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말했다. 그런데 이러한 경주와 연단은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히 10:24-25에서처럼 공동체를 염두에 둔 것이다. 공동체 속에서 하나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화평함이다. 서로 간에 하나될 수 있어야 한다. 공동체에 분열이 있을 때 하나 되기 힘들다. 우리 하나님과 더불어 우리는 화평함을 이루었기에 구원이 이루어졌다. 이 하나님과의 화평함이 공동체에도 임해야 한다. 공동체는 깨어짐의 모습이 자주 나타나곤 했다. 종종 자신들이 더 옳다는 이름하에 지체끼리 분열을 일으키고 미운 감정을 갖는다. 복음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화평함을 지킬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성경은 경고한다. 화평함이 없을 때 주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까지 말씀한다. 이것은 한국교계에 일어나는 갈등도 유념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어떤 때는 좋은 의도로 비판하는 이들조차도 상대를 혹시나 적이나 미움의 감정이 섞여서 대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둘째는 거룩함이다. 우리의 공동체는 세상과 다르다. 하나님에게서 출발하기에 하나님을 닮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거룩이다. 이러한 거룩함없이 하나님께 나아감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공동체는 무엇을 기반으로 하는 가를 주목해야 한다. 우리의 본질이 어디 있는지를 알 때 우리는 진정 주앞에 더욱 나아갈수 있다. 아무리 교회가 성장해서 커다란 건물과 좋은 시설, 목회자의 설교를 추종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할지라도 그곳에 거룩함이 없다면 그 교회 목회자와 공동체는 주를 보지 못할 수 있다.
본문은 강경하다.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걷는 믿음의 경주는 목숨을 걸기도 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며 나아가기도 하는 것임을 이전 장들에서 이미 보았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강경하다. 지금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교회들이나 일부 목회자들에게 거룩함이 있는 가 그것이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와는 무관하게 된다. 그런 이들만이 아니라 내 자신도 조심해야 한다.


15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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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뿌리
이렇게 화평함과 거룩함을 잊어버리고 깨어질 때 결국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주를 보지 못하게 된다. 주가 보이지 않으니까 화평함이 깨어지고 거룩함을 잃는 것이다. 그러한 공동체나 개인적으로나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갈수 없을 것이다. 경계할 수 있어야 한다.
또 마음 속에 쓴 뿌리를 주의해야 한다. 앞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이 꺠어지고 주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쓴 뿌리로 인함이 얼마나 많은가? 자기 마음 속에 불편한 마음, 뒷 감정이나 미움, 증오,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 욕심등 이 자신 속에 자라나고 결국 자신을 더럽힌다. 이러한 쓴 뿌리는 자기 자신만 걸려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마저 넘어지게 한다. 공동체를 더럽히고 오염시키게 된다. 우리는 하나이기에 개인의 문제는 개인에게서 그치지 않는다. 그러기에 이러한 쓴 뿌리는 작은 문제같지만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본문은 많은 사람이 더럽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쓴 뿌리는 한 사람의 문제를 넘어 공동체를 오염시키곤 하기 때문이다. 우리주위에 어려움이나 시험에 드는 이가 없는지 돌아보고 도울 수 있어야 할 것이고 또한 그 사람이 공동체에 어려움을 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상 돌아보아야 한다. 내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종종 목회자나 영적 지도자의 쓴 뿌리가 공동체에 치명적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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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행하는 자/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
또한 음행하는 자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는다. 성경은 우상숭배를 음란으로 규정하곤 한다.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부부관계를 더럽힌다는 측면에서 우상숭배와 음행은 연관이 있다. 하나님이 만드신 기초공동체인 부부의 관계를 우습게 만든다면 그를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이 시대는 음행마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경우들도 많다. 성 윤리가 상당히 약화된 시대에 살고 있다. 경건성을 돌아보아야 할 떄다. 진정 하나님 앞에서 깨끗함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할 때다.
또 망령된 자로 에서를 들고 있다. 하나님의 기업을 우습게 생각했던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다. 한 순간의 배고픔으로 인해 판단력을 잃고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던 에서를 우리는 어리석다 판단하지만 세상의 작은 유혹에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존심과 체면마저 버리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우리의 상급보다 세상의 이득을 바라고 추구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기에 교회 공동체에서도, 또 신자들의 삶에서도 그런 본이 안 되는 일들이 많은 것 아닌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잊기 때문아닐까? 가볍게 여기기 때문 아닐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경홀히 여긴다면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과 은혜를 경멸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공동체가 붙들어야 할 것을 놓치는 것이다. 결국 공동체에마저도 커다란 해를 미칠 것이다.




17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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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에서는 장자의 직분을 잃고 하나님의 축복을 야곱에게 빼앗긴 후 다시 이삭에게 그 축복을 구하지만 이미 그 때는 늦었다. 하나님의 축복을 잃은 후 회복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와 축복을 경망되게 여기는 자를 하나님은 죄없다 아니하신다. 경건하지 않은 자는 결국 가장 귀중히 여기고 또한 붙들어야 할 것을 놓치기 쉽다. 실패한 이후 다시 일어설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경우가 있을때가 있는 반면 실패하면 회복할수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은 갑작스레 한 번의 기회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평소의 불경건이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을 중요한 것으로 보지 못하는 영적 아둔함으로 나타난다. 중요한 때, 중요한 것을 쥐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실패하게 만든다. 지금 나의 영적 상태는 어떤 지를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 기회를 영영 놓쳐 버릴 때가 있을 수 있다.


18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19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20 이는 짐승이라도 그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
21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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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과거에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 인간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시내산에 임했던 하나님의 위엄을 생각해보라. 여러 선지자에게 놀라운 모습으로 임했던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선지자들도 두려워 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지기도 했다. 심지어 시내산은 짐승이라도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치라는 명령을 받기도 했고 사람들도 두려워 했다. 지금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하다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을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하나님은 달라지지 않으셨다. 모세조차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이다.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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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이른 곳 :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감은 그저 기도나 예배의 절차로 그치지 않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했던 것보다 더 영화롭고 거룩한 광경 속에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욱 우리에게 주어진 이 은혜를 귀중히 여기며 경외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지금 나는 그 경외함을 느끼며 사는 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종국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는 당연하겠지만 우리가 예배 드리는 자리만이 아니라 내가 QT하고 기도하는 자리 속에도 주의 놀라운 영광이 임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니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렇다. 그것을 인식할 때 우리의 삶은 달라진다. 우리가 느끼는 경험치는 다르다. 그 감격을 가지고 사는 이들은 달라진다. 생활하는 것과 태도가 달라진다. 그것을 느끼지 못하기에 우리의 삶은 주눅들고 힘들게 된다. 또 불경하게 된다.


25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26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27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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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이제 우리는 더욱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지금 내가 구약 때와 달리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 당신의 거룩이 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은 언제나 크고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말씀하는 이들, 특히 영적 지도자의 이야기도 경홀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말씀을 묵상할 때 내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설교 등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 속에서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실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 말씀은 거룩하시고 두려우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말씀과 약속을 분명하게 받았기에 그 거룩과 위엄에 대한 책임과 태도는 분명해야 한다. 그 은혜를 가볍게 여긴다면 그 죄는 더욱 크다 할수 있는 것이다.


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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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소멸하는 불
이제 우리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경외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불경건을 간과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에 대해 가볍게 여길 때 마치 용광로에 뛰어들면 타죽을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 앞에 소멸될 수밖에 없다. 정금은 남겠지만 가짜는 사라진다. 하나님이 우리를 징벌하시 위해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은 거룩하지 않은 것을 소멸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악한 것과 불경건은 소멸될 수밖에 없다. 진정 하나님 앞에 매순간 나아가는 이는 정련될 수밖에 없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우리를 돌아보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임한다. 그들이 받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기억하고 그 속에서 은혜를 받는다. 그것을 잊기에 우리는 근심하고 세상에 굴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쥐어야 할 것을 쥐어야 한다. 우리가 받는 나라를 기억할 때 우리는 기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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